definition | 함경남도 함흥 지역에서 아이가 아플 때 낫게 해 달라고 신에게 비는 제의에서 구송되는 무가. 는 황천곡(黃泉曲), 삼형제의 노래라고도 한다. 의 황천(黃泉)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저승이고 혼시는 혼(魂)의 방언 또는 와음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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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김명자 |
정의 | 함경남도 함흥 지역에서 아이가 아플 때 낫게 해 달라고 신에게 비는 제의에서 구송되는 무가. 는 황천곡(黃泉曲), 삼형제의 노래라고도 한다. 의 황천(黃泉)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저승이고 혼시는 혼(魂)의 방언 또는 와음으로 보인다. | 내용 | 무가는 손진태가 1926년 3월 함경남도 함흥군 운전면 궁서리의 본궁(本宮)에 사는 김쌍돌이(당시 71세)가 구송한 무가를 채록하여 「[조선신가유편](/topic/조선신가유편)(朝鮮神歌遺扁)」에 수록한 것이다. 내용은 송님동이, 이동이, 사마동이 삼형제가 백골을 잘 모신 덕으로 저승사자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잘 대접하여 저승길을 면했다는 이야기이다. 송님동이, 이동이, 사마동이 세 형제는 아버지가 있을 때 재산이 넉넉하여 잘 지냈으나 아버지 사후에는 겨우 밥이나 먹을 정도로 가난하였다. 하루는 칠석날이니 논밭 구경을 가자는 사마동이의 말에 따라 삼형제가 논밭 구경을 나갔다. 사방의 곡식이 모두 이삭이 좋고 잘 패어 삼형제는 각종 이삭을 잘라 [가지](/topic/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냥 먹지 않고 지신님, 산신령님, 조왕님께 제를 지낸 후에 농사를 시작하자는 사마동이의 말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송님동이는 [쟁기질](/topic/쟁기질)하고 이동이는 재를 뿌리고 사마동이는 씨를 뿌리면서 절반쯤 갈아 올라가니 흙속에서 백골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삼형제가 [속적삼](/topic/속적삼)을 벗어 백골을 모셔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방문 앞에 모셔두고 아침, 점심, 저녁마다 음식을 올리다 보니 세간이 바닥나게 되었다. 이렇게 5, 6년을 지내던 가운데 어느 날 밤에 백골이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이었다. 삼형제가 잠에서 깨어나 옷을 차려입고 극진히 세 번 절을 올린 뒤 물었다. “백골님. 어찌하여 이렇게 눈물을 흘리십니까? 저희가 아무 죄도 안 지었는데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를 만나서 호강을 잘하였다. 그런데 사흘 있으면 염라대왕이 와서 너희 삼형제를 잡아간단다.” “백골님 여태까지 저희가 수많은 세간을 바쳤으니 무슨 피할 길을 마련해 주십시오.” 백골은 검은 소를 잡아 서른 세 쟁반에 담은 다음 긍왕산 다리 위에 많은 음식과 함께 차려 놓고 다리 아래에 들어가 숨으라고 했다. 그러면 삼형제를 잡으러 온 저승사자들이 시장한 김에 그것을 먹고 나서 돌아앉아 [신발](/topic/신발)을 신을 테니 그때 앞에 가서 세 번 절을 올리고 살려 달라고 빌라고 하였다. 이윽고 저승사자 셋이 출발하여 긍왕산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저승사자 가운데 하나가 너무 시장하여 어린아이가 먹던 밥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러자 뒤에 있는 사자가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면서 인간을 하나도 아닌 셋이나 붙잡으러 가니 서둘러 바삐 가자고 한다. 저승사자들은 다리를 거의 다 건너왔을 때야 비로소 가득히 차려 놓은 음식을 발견했다. 그것을 본 사자들은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하는데 이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은 되지만 음식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셋이 앉아서 다 먹어치웠다. 그때 삼형제가 다리 아래에서 나와 사자들에게 수없이 절을 올리고 각기 신분을 밝혔다. “너희의 음식을 우리가 먹었으니 어찌 그냥 갈 수 있겠느냐. 송님동이는 누런 황소를 급히 끌어오고, 이동이는 기름종이로 만든 비옷 한 벌을 내오고, 사마동이는 놋항아리를 내오너라.” 저승사자들이 황소와 비옷과 놋항아리를 가지고 염라국의 [대문](/topic/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염라대왕은 “송님동이를 왜 못 잡아왔느냐?”고 물었다. “방방곡곡을 찾아다녔으나 송님동이란 이름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 고을에 누런 황소가 있기에 고삐를 풀어 가지고 왔습니다.” 염라대왕이 이동이도 없더냐고 하자 저승사자는 “없기에 그 고을에 있는 비옷을 벗겨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염라대왕이 사마동이도 없더냐고 하니 “방방곡곡을 다 다녀도 사마동이란 이름이 없어서 그 고을에 있는 놋항아리를 들고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삼형제는 죽음을 면하고 여든 한 살까지 살았고, 죽은 뒤에는 아이가 아플 때 황천혼시 제(祭)를 받는 성인(聖人)신이 되었다. | 지역사례 | 굿과 주인공의 성격은 다르지만 수명을 연장하는 내용을 담은 [무속신화](/topic/무속신화)는 여러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주도의 는 의 내용과 가장 근접하다. 이 밖에 충남 부여 지역의 축원굿 가운데 한 석(席)인 , 고창 지역의 씨끔굿에서 부르는 , 전남 고흥 지역의 씻김굿에서 부르는 등도 수명을 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는 제주도 무당굿에서 심방이 노래하는 본풀이의 하나로, 라고도 한다. 이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사만이’인 데서 붙여진 것이다. 모든 굿에서 액막이를 할 때 불린다. 명관(冥官) 또는 명감(冥感)의 와음(訛音)으로 보이는 맹감은 본풀이의 내용이나 액막이 제차(祭次) 내용으로 보면 저승사자, 곧 차사의 이칭으로 되어 있다. 무가는 장주근이 1962년 8월 제주도 구좌면 세화리에 거주하는 고대중(당시 46세)이 구송한 무가를 채록하여 『제주도 무속과 서사무가』에 수록하였다. 이 밖에도 진성기가 조사하여 프린트본으로 만든 『남국의 무가』에도 수록되어 있다. 옛날 주년국 땅에 소사만이가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혼인을 하여 자식은 태어나고 부인이 [바느질](/topic/바느질) 품팔이로 끼니를 이어가면서 살림은 더욱 곤궁했다. 어느 날 부인이 머리카락을 끊어 남편에게 주며 장에 가서 팔아 아이들 먹을 쌀을 사오라고 한다. 사만이는 장에 가 머리카락을 팔아 석 냥을 받고 쌀을 사러 다니다가 조총을 하나 샀다. 이것으로 사냥하면 쌀도 나오고 돈도 나온다는 장사꾼의 말에 솔깃해 사온 것이다. 부인의 타박을 들으면서 사만이는 사냥을 나갔으나 며칠이 되어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사만이는 들판을 헤매다가 백년해골을 발견하고 이게 집안 조상이 아닌가 하여 집으로 모셔다가 위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사냥이 잘되어 사만이는 삽시간에 부자가 되었다. 사만이가 서른세 살이 되는 해 어느 날 밤 꿈에 백년해골이 백발노장으로 나타나서 “너는 서른세 살로 정명이 다 되어 삼 차사가 잡으러 오고 있으니 관디 셋, 띠 셋, [신발](/topic/신발) 세 켤레와 여러 음식을 차려 세거릿길에 가서 정성을 들이고, 집에서는 큰굿을 해야 액을 막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사만이가 그대로 차리고 엎드려 있으니 과연 차사 셋이 내려왔다. 배가 고픈 삼 차사는 우선 음식을 먹고, 신발을 갈아 신고, 관디와 띠를 갈아매고는 그 주인을 찾았다. 사만이가 주인임을 안 삼 차사는 사만이의 집에 와 굿 정성까지 받으니 사만이를 잡아갈 수가 없었다. 삼 차사는 대책을 의논하고 그대로 돌아간 뒤 사만이 정명 삼십이라 쓴 저승문서에 ‘열십(十) 자’에 한 획을 비껴 ‘일천 천(千) 자’를 만들어 놓았다. 이래서 사만이는 삼천 년을 잘살았다고 한다. 이 밖에 다른 무속신화에는 저승문서의 정명을 고치고 소사만이 대신 이름이 같은 유사만이 또는 오사만이를 잡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여 지역의 축원굿 가운데 여덟 번째 거리에서 구송되는 는 김태곤이 1966년 1월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 거주하는 세습무 [이어인년](/topic/이어인년) 무녀가 구송한 무가를 채록하여 『한국무가집(韓國巫歌集)』 1권에 수록하였다. 는 나쁜 액운을 면하고 오래 살 수 있는 장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옛날에 사마장자란 사람이 있었다. 사람 됨됨이가 무척 엄했으나 심성이 인색한 소문난 구두쇠였다. 그는 수만 석 수천 석의 곡식을 받아도 쌀이 아까워 부모 제사에 밥 한 그릇 차리지 않았다. 그러니 일가와 화목하지 않고, 동기간에 우애 없고, 없는 사람 도울 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마장자가 정월 초하룻날 밤에 참으로 해괴하고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가 먹던 은수저가 세 토막으로 나고, 먹던 은밥그릇의 굽이 빠져 보이고, [지붕](/topic/지붕)에 흰 것이 앉아 보이고, [마당](/topic/마당)에 [상식상](/topic/상식상)(上食床)이 있어 보이고, 사랑 앞의 행자목(杏子木)이 춤을 춰 보이고, 사마장자가 사인교(四人轎)를 타 보이는 꿈이었다. 사마장자는 아들, 딸, 며느리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던 딸이 달려들어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할 꿈이라고 좋아한다. 그러나 며느리는 엄숙한 얼굴로 조용하게 아뢰면서 아버님이 돌아가실 꿈이라고 해몽을 한다. “제가 친정에서 보면 조상님 제사도 지내고, 정월이면 당산에 [고사](/topic/고사)도 하고, 거리에 논제[路祭]도 지내고, 없는 사람 도와도 주던데 제가 시집온 지 칠팔 년이 되어도 아무것도 없었으니 아버님이 돌아가실 꿈입니다. 해몽을 드릴 테니 바른대로 들으시오. 새로 집터 다진 것은 관중(棺中) 안을 다듬는 것이고, 사인교 탄 것은 상여 탈 징조입니다. 사랑 앞의 행자목이 춤춘 것은 그 나무 베어내어 관을 만든다는 뜻이고, 마당에 상식상 놓은 것은 [사자상](/topic/사자상)(使者床)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붕에 흰 게 보이는 것은 아버님 [속적삼](/topic/속적삼)으로 초혼하는 일이고, 잡숫던 은수저가 삼 도막 나뵈는 것은 돌아가시면 맥을 끊는다는 뜻입니다. 잡숫는 은밥그릇 굽이 빠져 뵈는 것은 목숨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기겁을 한 사마장자가 며느리에게 묻는다. 며느리는 종이를 꺼내 생금(生金) 닷 되를 싸주면서 어서 빨리 문복(問卜)쟁이를 찾아가라고 한다. 사마장자는 금싸래기 서 되 서 홉까지 다 싸 [가지](/topic/가지)고 점쟁이를 찾아간다. 점쟁이의 [점사](/topic/점사)에도 역시 사마장자가 죽을 꿈이라고 한다. 사마장자가 [학창의](/topic/학창의)(鶴氅衣)도 벗어 놓고, 통영관도 벗어 놓고, 산호 동굿도 빼어 놓고, 대모풍잠(玳瑁風簪)도 떼어서 복채로 주며 빌었다. 점쟁이는 그동안 사마장자가 없는 사람도 도와주지 않고, 조상에게 제사밥도 올리지 않고, 쌀을 팔아도 누런 쌀에 누런 모래를 섞어 팔고, 흰쌀에 흰 모래를 섞어 팔고, 장리(長利)를 주어도 작은 말로 주고 큰 말로 받는 등 악행을 한 점을 일일이 들어 말했다. 장자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살 수 있는 방도를 물었다. “장자님이 살려면 이 길로 돌아가서 앞노적 뒷노적 헐어내어 동네 기민(饑民) 주고 술도 섬으로 하고, 밥도 섬으로 하고, 떡도 섬으로 하고, 돼지 잡고, 옷도 세 벌 새로 짓고, [광목](/topic/광목)을 길게 깔고 돈으로 유두(충청도에서 말하는 얕은 냇물을 발 벗지 않고 건널 수 있도록 돌을 놓아 다리 구실을 할 수 있게 만든 것. 징검다리류도 유두에 속함) 놓고 사자풀이를 하다 보면 저승사자가 나올 테니 그 사자들에게 살려 달라고 하시오.” 사마장자는 급히 집으로 돌아와 며느리에게 일렀다. “여봐라. 며늘아가, 앞노적 뒷노적 헐어내어 동네 기민에게 주라더라. 옷도 세 벌 새로 짓고 돈도 삼천 냥 내어놓고, 소 잡고 돼지 잡고 사제풀이 하라더라.” 이렇게 집안 식구들을 동원하여 모든 준비를 마친 사마장자는 마당에 차일 치고 상을 차려 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려 사자풀이를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자 저승사자, 이승사자, 강님도령, 강님차사가 나온다. 어떤 사자는 쇠사슬, 어떤 사자는 쇠뭉치를 각각 손에 들었다. 이승사자가 들고 온 사명기(司命旗)를 마당에 꽂는다. 사마장자는 세수를 정히 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나아가 제 목숨 값으로 재물을 바친다며 살려 달라고 애원한다. 사자들은 저희끼리 말을 주고받는다. “여봐라, 우리 이 음식을 먹어도 뉘 음식인가 성명이나 알고 먹세.” “가만히 들어보니 사마장자의 축원이구먼.” “이 공덕 저 공덕 하여도 [부엌](/topic/부엌) 공덕이 제일이라. 우리가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의복](/topic/의복)도 남루하니 젖은 옷은 벗어 놓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다른 데로 가면 어떻겠나.” “우리가 젖은 옷 벗고 마른 옷 입고 돈 천 냥씩 꽁무니에 차고 술로 목욕하고 고기로 양치질하고 떡 먹고 메로 운감(殞感)하고 우마장자네 집으로 가세.” 이렇게 해서 사마장자는 죽을 [고비](/topic/고비)를 면한다. 일곱 식구가 [짚신](/topic/짚신)을 삼아 먹고사는 우마장자네 집에서는 갑작스런 변고가 생겼다. 저녁까지도 몸이 성하던 우마장자가 새벽이 되면서 갑작스레 병이 들었다. 밤새도록 냉수를 찾다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부르다가 붕어눈을 부릅뜨고 죽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사자들은 우마장자를 잡아끌며 어서 가자고 재촉한다. 우마장자는 먹던 양식을 봉해 두고 만당에 이별하며 성주께 이별하고 조상에게 하직하고 길을 떠난다. “여봐라, 네가 한강역사 옆에 가서 조사를 받을 적에 과연 네가 사마장자냐 하거든 예 하고 대답해야지 엉뚱하게 대답하면 두 번 죽음 시키겠다.” 사마장자로부터 뇌물을 먹은 사자들은 우마장자를 협박했다. 그제야 우마장자는 자기가 사마장자 대신 잡혀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신수가 사나우면 이렇게 남 대신 죽기도 하고, 돈이 많으면 귀신도 사귀고 자손도 신께 빌어 얻을 수 있는 법이다. | 의의 | , , 무가는 모두 대명(代命) 또는 연명(延命)설화형의 서사무가이다. 고전소설 에도 유사한 화소(話素)가 보인다. 이를 통해 서사무가와 고전소설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자상](/topic/사자상)에 사잣밥과 [짚신](/topic/짚신) 세 켤레를 만들어 놓는 습속을 뒷받침하는 등 유교의례를 상징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무속에 수용된 유교 의례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이들 [무속신화](/topic/무속신화)에 따르면 사람이 죽는 것은 저승에서 사자를 보내 혼령을 잡아가기 때문이며, 이것은 저승세계에서 관장한다고 믿는다. 또한 무속의 신도 현실계의 인간과 마찬[가지](/topic/가지)로 음식을 필요로 하고 돈을 좋아한다고 믿고 있으며, 저승사자도 인정에는 약하고 염라대왕도 사자들에게 속아 넘어간다는 내용에서 무속의 신관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오래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현세 중심의 무속적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 는 아이가 아플 때 낫게 해 달라고 무가 속에 나오는 삼형제 신에게 비는 제의에서 구송된다. 이 무가에서 삼형제 신은 아이들의 수명을 관장하는 무속의 신격으로 볼 수 있다. | 참고문헌 | 남국의 무가 (진성기, 제주민속문화연구소, 1968) 한국무가집 3 (김태곤, 집문당, 1978) [조선신가유편](/topic/조선신가유편) (손진태, 손진태선생전집 5, 태학사-영인, 1981) 한국의 [무속신화](/topic/무속신화) (김태곤, 집문당, 19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7-[맹감본풀이](/topic/맹감본풀이) (현용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황천혼시무가 (서대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민간신앙과 [일생의례](/topic/일생의례)의 [수수](/topic/수수)관계 (김명자, 한국종교민속연구회편, 종교와 일생의례, 민속원,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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