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백월산홍가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白月山) 산정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에서 홍주성(洪州城) 내 홍성 읍민(현재 행정구역상 오관리1․2․3구 주민)들이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안으로 인일(寅日)이나 묘일(卯日) 가운데 길일(吉日)을 택해 지내는 산신제. 홍가신제를 [마을](/topic/마을) 주민들은 산제(山祭), 정난사제(靖難祠祭), 홍가신제(洪可臣祭)라 부른다. 관(官)에서는 ‘백월산제(白月山祭)’란 이름으로 ‘홍성문화재 1호’로 지정하여 홍성내포축제가 거행될 때 제의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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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白月山) 산정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에서 홍주성(洪州城) 내 홍성 읍민(현재 행정구역상 오관리1․2․3구 주민)들이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안으로 인일(寅日)이나 묘일(卯日) 가운데 길일(吉日)을 택해 지내는 산신제. 홍가신제를 [마을](/topic/마을) 주민들은 산제(山祭), 정난사제(靖難祠祭), 홍가신제(洪可臣祭)라 부른다. 관(官)에서는 ‘백월산제(白月山祭)’란 이름으로 ‘홍성문화재 1호’로 지정하여 홍성내포축제가 거행될 때 제의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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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호
정의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白月山) 산정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에서 홍주성(洪州城) 내 홍성 읍민(현재 행정구역상 오관리1․2․3구 주민)들이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안으로 인일(寅日)이나 묘일(卯日) 가운데 길일(吉日)을 택해 지내는 산신제. 홍가신제를 [마을](/topic/마을) 주민들은 산제(山祭), 정난사제(靖難祠祭), 홍가신제(洪可臣祭)라 부른다. 관(官)에서는 ‘백월산제(白月山祭)’란 이름으로 ‘홍성문화재 1호’로 지정하여 홍성내포축제가 거행될 때 제의를 치른다.
정의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白月山) 산정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에서 홍주성(洪州城) 내 홍성 읍민(현재 행정구역상 오관리1․2․3구 주민)들이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안으로 인일(寅日)이나 묘일(卯日) 가운데 길일(吉日)을 택해 지내는 산신제. 홍가신제를 [마을](/topic/마을) 주민들은 산제(山祭), 정난사제(靖難祠祭), 홍가신제(洪可臣祭)라 부른다. 관(官)에서는 ‘백월산제(白月山祭)’란 이름으로 ‘홍성문화재 1호’로 지정하여 홍성내포축제가 거행될 때 제의를 치른다.
참조[홍성백월산홍가신[사당](/topic/사당)](/topic/홍성백월산홍가신사당)
참고문헌홍성군지(증보판) (홍성군지편찬위원회, 홍성군,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4․17․25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충남 서해안의 [마을](/topic/마을) 공동체 신앙 연구 (이관호,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2)
내포지역 마을신앙의 전승과 [변이](/topic/변이) (이관호,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참조[홍성백월산홍가신[사당](/topic/사당)](/topic/홍성백월산홍가신사당)
참고문헌홍성군지(증보판) (홍성군지편찬위원회, 홍성군,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4․17․25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충남 서해안의 [마을](/topic/마을) 공동체 신앙 연구 (이관호,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2)
내포지역 마을신앙의 전승과 [변이](/topic/변이) (이관호,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내용홍성읍에서 서쪽으로 약 4㎞ 가면 해발 394m의 백월산이 나온다. 일월산(日月山) 또는 월산(月山)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홍성읍의 주산(主山)으로, 홍성읍을 굽어보고 있다. 백월산 주변에는 동쪽으로 홍성읍 월산리, 서쪽으로 갈산면 갈오리, 남쪽으로 구항면 오봉리와 황곡리, 북쪽으로 홍북면 중계리 등 3개 면 1개 읍이 펼쳐져 있다.

백월산에는 신라 초엽에 만들어진 해풍현(海豊縣)의 성터인 해풍현성지(海豊縣城址)가 있다. 둘레가 9,700여 척이나 되는 석성(石城)인 이곳에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석성 안에는 [우물](/topic/우물)이 하나 있으며, 산 정상에는 홍성읍을 내려다보고 있는 홍가신사당이 있다. 홍가신사당에는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라는 [현판](/topic/현판)이 붙어 있다. 이곳에는 조선조 [이몽학](/topic/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로를 잊지 못하여 당시 홍주목사인 홍가신과 그 휘하의 장수 등 다섯 분의 [위패](/topic/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안으로 인일이나 묘일 가운데 길일을 택해 홍성읍 오관리1․2․3구 주민들이 홍가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때 제의를 앞두고 [마을](/topic/마을)에 부정한 일이 발생하면 1주일 이상 제를 연기한다.

홍가신제를 산제, 정난사제, 백월산제라고도 한다. 이처럼 제의 명칭이 다양한 만큼 제당 명칭 역시 산제당, 홍가신사당, 부엉공(또는 부원공), 홍주정난사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정난사’를 ‘청난사(淸難祠)’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고장을 맑게 해 준 공신을 모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제당은 석재(石材)로 지은 [기와집](/topic/기와집)이다. 현재 당집 바로 [직전](/topic/직전)의 [사당](/topic/사당)은 1975년 당시 홍성군수 조영호의 지원으로 마을 주민 복선채 등이 중수한 것이다. 그러나 2004년 12월 홍주정난사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제당을 비롯하여 내부에 있던 목상과 위패 등이 소실되면서 2006년 3월 15일에 지금의 사당을 새로 지었다. 현재 사당은 붉은 벽돌에 [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이다. 쌍[여닫이](/topic/여닫이) 나무문은 쌍 여닫이 유리문으로 바꿨으며, 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창문을 두고 있다.

한편 사당에 대한 기록 역시 유래에서 살펴본 청난비와 건물의 중수(中修)를 기록한 상량문(上樑文)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로 보아 홍주정난사는 1618년(戊午, 광해군 10)에 창건하고 1886년(丙戌, 고종 23) 2월 15일, 1929년(己巳), 1975년(甲寅) 3월 27일에 각각 중수한 다음 2004년 12월 화재로 인해 2006년 새로이 사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당 안에는 오른쪽에 홍가신 목사(牧使), 최호 수사(水使), 박명현 우후(虞候), 임득의 파총(把摠), 신경행 등 청난공신의 위패가 있다. 가운데에는 ‘백월산신지위(白月山神之位)’라는 산신 위패가 있다. 왼쪽에는 홍가신 일가(一家)로 보이는 목상 5기가 있다. 목상은 남상(男像)이 2기, 여상(女像)이 3기이다. 가운데의 목상이 홍가신이고 오른쪽에 아들과 막내딸, 왼쪽에 부인과 큰딸로 보이는 목상이 각각 있다.

홍가신(중종 36~광해군 7, 1541~1615)은 현재 충남 아산시 염치읍에서 태어났다. 현재 염치읍 대동리에 있는 만전당 경전각은 홍가신의 후손들이 홍가신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그 후손에 따르면 족보상에 홍가신은 직계 후손이 없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아무튼 제보자의 말에 따르면 목상은 16세기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목상 역시 안타깝게도 2004년 말 제당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소실되면서 2006년 기존의 목상을 모태로 새로 조각하여 사당에 모셔 놓았다. 그러나 그 모습이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제관](/topic/제관)은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 깨끗하고 정갈한 사람으로 정월 초하루를 전후하여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출되면 제 지낼 때까지 많은 금기사항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축관은 제관보다 덜 엄격하여 생기복덕을 보지 않는다. 단지 마을에서 한학(漢學)을 한 사람으로서 부정하지만 않으면 축관으로 선출한다. 요즈음엔 한학을 한 사람이 드물어 [축문](/topic/축문)을 한글로 쓰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제의 비용은 걸립을 하여 충당한다. 걸립은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홍가신이란 큰 기(旗)를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면서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한다. 그러면 주민들은 성의껏 곡식이나 돈 등을 내놓는다. 한 번 제를 지내기 위해 소요되는 경비는 약 20만 원이다. 그러나 군에서 주도하는 백월산제의 경우 모든 경비를 군에서 부담한다.

제물은 홍가신제의 경우 감주, 산나물 3[가지](/topic/가지), 통밤, 삼색실과, 돼지머리, 메, 백설기, 김, 포 등이다. 유황제의 경우에는 멱만을 진설한다. 여기서 제물은 산신을 위한 제물 1상, 위패를 위한 제물 1상, 대감을 위한 제물 1상 등 모두 3상을 차린다. 돼지머리와 백설기는 1개만을 준비하고 메와 미역국은 11개씩 준비한다. 제물의 준비는 제관이 한다. 제기는 기존의 것을 해마다 사용하며 마을 주민 복선채 집에 보관한다.

![마을신앙 홍성백월산홍가신제](/upload/img/20170106/20170106145822_t_.jpg)

제의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날짜가 잡히면 읍내에 있는 조양문(朝陽門, 동문)에 [황토](/topic/황토)를 뿌린다. 이때 제관의 집에도 황토를 뿌리고 왼새끼로 꼰 [금줄](/topic/금줄)을 친다. 제일 당일이 되면 새벽에 준비된 제물을 들고 홍가신이란 깃대를 앞세워 백월산 당집이 있는 곳으로 간다. 당집에 도착하면 제단 주변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편 다음 산 정상에 있는 우물에서 [샘제](/topic/샘제)를 지낸다. 샘제가 끝나면 이어 홍가신제를 지낸다. 홍가신제는 제물을 진설한 다음 삼배(拜)를 한다. 세 번 절하는 이유는 산신과 다섯 분의 위패, 홍가신 목사의 가족을 상징하는 목상에게 한 번씩 절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초혼(招魂)이라고 한다. 초혼이 끝나면 잔을 올리고 다시 삼배를 한 다음 [독축](/topic/독축)(讀祝)을 한다. 축문에는 군민의 무사함과 태평성대함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독축이 끝나면 다시 삼배를 하고, 소지(燒紙)를 올린다. 소지는 대동소지, 이어 군수, 읍민, 읍장, 경찰서장, 각 기관장, 제관, 걸립에 참여한 사람 및 그 가족들의 순으로 올린다. 제의가 끝나면 하산한다. 한편 마을에 남아 있던 동민들은 목상 인물과 똑같은 [허수아비](/topic/허수아비) 다섯 개를 만들어 가마에 태워서 제를 지내고 하산하는 사람들을 마중 나간다. 그리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 홍가신의 [혼백](/topic/혼백)을 허수아비에 옮기고 함께 내려와 풍물을 울리면서 홍성읍 내의 중요 지역을 돌며 샘제 등을 지낸 뒤 북문교 다리 밑에서 허수아비를 불태운다. 이때 연기가 백월산 쪽으로 향해 올라가면 홍가신의 혼백이 백월산으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하여 좋아한다. 그런데 홍가신제를 지내는 음력 정월은 계절적으로 북서풍이 부는 계절이어서 백월산의 동남쪽에 있는 홍성읍에서 불을 피워 그 연기가 백월산 쪽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모든 절차가 끝나면 마을로 돌아와 풍물을 치면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하루를 즐긴다.

제의 장소에는 부정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참가 인원은 보통 30~40명이지만 많은 경우 70~80명이 된다. 또한 정월 길일을 택해 인근에 있는 무당들이 개인적으로 이곳을 많이 찾는다. 그런데 군 당국에서는 미신이라 하여 무당들의 굿을 제재하고 있다.

홍가신제의 금기에 대한 한 실례가 전해오고 있다. 1970년대 초반에 홍성군수 등이 이 제의를 소홀히 하여 서너 차례 연기하였다. 그 이후 군수가 좌천되고 군청사가 불탔으며, 홍성읍장과 특무대장이 아무 이유 없이 죽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산제를 지내지 않아 그러한 불상사가 일어났다고 여기고 이후 정성껏 산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그 이후 홍성 군수는 부임하는 즉시 홍주정난사에 가서 제를 지내고 위한다고 한다.
내용홍성읍에서 서쪽으로 약 4㎞ 가면 해발 394m의 백월산이 나온다. 일월산(日月山) 또는 월산(月山)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홍성읍의 주산(主山)으로, 홍성읍을 굽어보고 있다. 백월산 주변에는 동쪽으로 홍성읍 월산리, 서쪽으로 갈산면 갈오리, 남쪽으로 구항면 오봉리와 황곡리, 북쪽으로 홍북면 중계리 등 3개 면 1개 읍이 펼쳐져 있다.

백월산에는 신라 초엽에 만들어진 해풍현(海豊縣)의 성터인 해풍현성지(海豊縣城址)가 있다. 둘레가 9,700여 척이나 되는 석성(石城)인 이곳에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석성 안에는 [우물](/topic/우물)이 하나 있으며, 산 정상에는 홍성읍을 내려다보고 있는 홍가신사당이 있다. 홍가신사당에는 「홍주정난사(洪州靖難祠)」라는 [현판](/topic/현판)이 붙어 있다. 이곳에는 조선조 [이몽학](/topic/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로를 잊지 못하여 당시 홍주목사인 홍가신과 그 휘하의 장수 등 다섯 분의 [위패](/topic/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안으로 인일이나 묘일 가운데 길일을 택해 홍성읍 오관리1․2․3구 주민들이 홍가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때 제의를 앞두고 [마을](/topic/마을)에 부정한 일이 발생하면 1주일 이상 제를 연기한다.

홍가신제를 산제, 정난사제, 백월산제라고도 한다. 이처럼 제의 명칭이 다양한 만큼 제당 명칭 역시 산제당, 홍가신사당, 부엉공(또는 부원공), 홍주정난사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정난사’를 ‘청난사(淸難祠)’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고장을 맑게 해 준 공신을 모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제당은 석재(石材)로 지은 [기와집](/topic/기와집)이다. 현재 당집 바로 [직전](/topic/직전)의 [사당](/topic/사당)은 1975년 당시 홍성군수 조영호의 지원으로 마을 주민 복선채 등이 중수한 것이다. 그러나 2004년 12월 홍주정난사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제당을 비롯하여 내부에 있던 목상과 위패 등이 소실되면서 2006년 3월 15일에 지금의 사당을 새로 지었다. 현재 사당은 붉은 벽돌에 [기와](/topic/기와)[지붕](/topic/지붕)이다. 쌍[여닫이](/topic/여닫이) 나무문은 쌍 여닫이 유리문으로 바꿨으며, 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창문을 두고 있다.

한편 사당에 대한 기록 역시 유래에서 살펴본 청난비와 건물의 중수(中修)를 기록한 상량문(上樑文)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로 보아 홍주정난사는 1618년(戊午, 광해군 10)에 창건하고 1886년(丙戌, 고종 23) 2월 15일, 1929년(己巳), 1975년(甲寅) 3월 27일에 각각 중수한 다음 2004년 12월 화재로 인해 2006년 새로이 사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당 안에는 오른쪽에 홍가신 목사(牧使), 최호 수사(水使), 박명현 우후(虞候), 임득의 파총(把摠), 신경행 등 청난공신의 위패가 있다. 가운데에는 ‘백월산신지위(白月山神之位)’라는 산신 위패가 있다. 왼쪽에는 홍가신 일가(一家)로 보이는 목상 5기가 있다. 목상은 남상(男像)이 2기, 여상(女像)이 3기이다. 가운데의 목상이 홍가신이고 오른쪽에 아들과 막내딸, 왼쪽에 부인과 큰딸로 보이는 목상이 각각 있다.

홍가신(중종 36~광해군 7, 1541~1615)은 현재 충남 아산시 염치읍에서 태어났다. 현재 염치읍 대동리에 있는 만전당 경전각은 홍가신의 후손들이 홍가신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그 후손에 따르면 족보상에 홍가신은 직계 후손이 없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아무튼 제보자의 말에 따르면 목상은 16세기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목상 역시 안타깝게도 2004년 말 제당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소실되면서 2006년 기존의 목상을 모태로 새로 조각하여 사당에 모셔 놓았다. 그러나 그 모습이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제관](/topic/제관)은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 깨끗하고 정갈한 사람으로 정월 초하루를 전후하여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출되면 제 지낼 때까지 많은 금기사항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축관은 제관보다 덜 엄격하여 생기복덕을 보지 않는다. 단지 마을에서 한학(漢學)을 한 사람으로서 부정하지만 않으면 축관으로 선출한다. 요즈음엔 한학을 한 사람이 드물어 [축문](/topic/축문)을 한글로 쓰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제의 비용은 걸립을 하여 충당한다. 걸립은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홍가신이란 큰 기(旗)를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면서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한다. 그러면 주민들은 성의껏 곡식이나 돈 등을 내놓는다. 한 번 제를 지내기 위해 소요되는 경비는 약 20만 원이다. 그러나 군에서 주도하는 백월산제의 경우 모든 경비를 군에서 부담한다.

제물은 홍가신제의 경우 감주, 산나물 3[가지](/topic/가지), 통밤, 삼색실과, 돼지머리, 메, 백설기, 김, 포 등이다. 유황제의 경우에는 멱만을 진설한다. 여기서 제물은 산신을 위한 제물 1상, 위패를 위한 제물 1상, 대감을 위한 제물 1상 등 모두 3상을 차린다. 돼지머리와 백설기는 1개만을 준비하고 메와 미역국은 11개씩 준비한다. 제물의 준비는 제관이 한다. 제기는 기존의 것을 해마다 사용하며 마을 주민 복선채 집에 보관한다.

![마을신앙 홍성백월산홍가신제](/upload/img/20170106/20170106145822_t_.jpg)

제의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날짜가 잡히면 읍내에 있는 조양문(朝陽門, 동문)에 [황토](/topic/황토)를 뿌린다. 이때 제관의 집에도 황토를 뿌리고 왼새끼로 꼰 [금줄](/topic/금줄)을 친다. 제일 당일이 되면 새벽에 준비된 제물을 들고 홍가신이란 깃대를 앞세워 백월산 당집이 있는 곳으로 간다. 당집에 도착하면 제단 주변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편 다음 산 정상에 있는 우물에서 [샘제](/topic/샘제)를 지낸다. 샘제가 끝나면 이어 홍가신제를 지낸다. 홍가신제는 제물을 진설한 다음 삼배(拜)를 한다. 세 번 절하는 이유는 산신과 다섯 분의 위패, 홍가신 목사의 가족을 상징하는 목상에게 한 번씩 절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초혼(招魂)이라고 한다. 초혼이 끝나면 잔을 올리고 다시 삼배를 한 다음 [독축](/topic/독축)(讀祝)을 한다. 축문에는 군민의 무사함과 태평성대함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독축이 끝나면 다시 삼배를 하고, 소지(燒紙)를 올린다. 소지는 대동소지, 이어 군수, 읍민, 읍장, 경찰서장, 각 기관장, 제관, 걸립에 참여한 사람 및 그 가족들의 순으로 올린다. 제의가 끝나면 하산한다. 한편 마을에 남아 있던 동민들은 목상 인물과 똑같은 [허수아비](/topic/허수아비) 다섯 개를 만들어 가마에 태워서 제를 지내고 하산하는 사람들을 마중 나간다. 그리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 홍가신의 [혼백](/topic/혼백)을 허수아비에 옮기고 함께 내려와 풍물을 울리면서 홍성읍 내의 중요 지역을 돌며 샘제 등을 지낸 뒤 북문교 다리 밑에서 허수아비를 불태운다. 이때 연기가 백월산 쪽으로 향해 올라가면 홍가신의 혼백이 백월산으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하여 좋아한다. 그런데 홍가신제를 지내는 음력 정월은 계절적으로 북서풍이 부는 계절이어서 백월산의 동남쪽에 있는 홍성읍에서 불을 피워 그 연기가 백월산 쪽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모든 절차가 끝나면 마을로 돌아와 풍물을 치면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하루를 즐긴다.

제의 장소에는 부정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참가 인원은 보통 30~40명이지만 많은 경우 70~80명이 된다. 또한 정월 길일을 택해 인근에 있는 무당들이 개인적으로 이곳을 많이 찾는다. 그런데 군 당국에서는 미신이라 하여 무당들의 굿을 제재하고 있다.

홍가신제의 금기에 대한 한 실례가 전해오고 있다. 1970년대 초반에 홍성군수 등이 이 제의를 소홀히 하여 서너 차례 연기하였다. 그 이후 군수가 좌천되고 군청사가 불탔으며, 홍성읍장과 특무대장이 아무 이유 없이 죽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산제를 지내지 않아 그러한 불상사가 일어났다고 여기고 이후 정성껏 산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그 이후 홍성 군수는 부임하는 즉시 홍주정난사에 가서 제를 지내고 위한다고 한다.
유래1596년(선조 29)에 [이몽학](/topic/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홍주목사 홍가신과 그 밖의 청난공신 등 모두 다섯 분의 위업을 기리는 데서 유래한다. 이몽학의 난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에 이몽학(?~1596)이 주동이 되어 김경창(金慶昌), 이구(李龜), 장후재(張後載), 사노(私奴) 팽종(彭從), 승려 능운(凌雲) 등과 함께 승속군(僧俗軍) 600~700명을 거느리고 충청도에서 일으킨 난이다. 1596년 7월에 이몽학 일당은 야음을 틈타 홍산현(鴻山縣)을 습격하여 이를 함락한 데 이어 임천군(林川郡), 정산현(定山縣), 청양현(靑陽縣), 대흥군(大興郡)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홍주목사 홍가신은 무장(武將) 박명현(朴名賢)과 임득의(林得義) 등을 기용함은 물론 제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 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힘을 합해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한편 이몽학은 그의 부하인 김경창, 임억명(林億命), 태근(太斤) 등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난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을 세운 홍가신 목사 등 다섯 명에게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을 책록하였다.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행․임득의가 책록되었다. 이들 다섯 명의 공신은 현재 내포 지역의 중심지인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 홍가신사당에 모셔져 있다.

한편 홍가신 목사가 선정을 베풀고 홍주를 떠난 뒤 홍주읍성에는 각종 질병이 해마다 끊이지 않는 등 괴변이 잇달아 일어나자 이를 방지하고 그를 사모하는 뜻에서 홍주의 주산(主山)인 백월산에 그분의 목상을 세우고 성안의 사람들이 해마다 제를 지냈다. 그러고 나서 각종 질병이 사라지고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는 1641년(인조 19)에 김광현(金光鉉, 1584~1647)이 건립한 청난비(淸難碑, 충남 문화재자료 제165호)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는 “공(公)이 돌아가신 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 공의 충정은 더욱 빛난다. 홍주 사람들이 그 덕(德)을 사모하여 [사당](/topic/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노라. 백월산의 양지쪽 소나무 [기둥](/topic/기둥)에 잣나무 판자 신령을 모시고 그 앞에 제기를 늘어놓으니 [가지](/topic/가지) 붉고, 파초열매 누렇구나”라고 청난비에 새겨놓았다.
유래1596년(선조 29)에 [이몽학](/topic/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홍주목사 홍가신과 그 밖의 청난공신 등 모두 다섯 분의 위업을 기리는 데서 유래한다. 이몽학의 난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에 이몽학(?~1596)이 주동이 되어 김경창(金慶昌), 이구(李龜), 장후재(張後載), 사노(私奴) 팽종(彭從), 승려 능운(凌雲) 등과 함께 승속군(僧俗軍) 600~700명을 거느리고 충청도에서 일으킨 난이다. 1596년 7월에 이몽학 일당은 야음을 틈타 홍산현(鴻山縣)을 습격하여 이를 함락한 데 이어 임천군(林川郡), 정산현(定山縣), 청양현(靑陽縣), 대흥군(大興郡)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홍주목사 홍가신은 무장(武將) 박명현(朴名賢)과 임득의(林得義) 등을 기용함은 물론 제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 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힘을 합해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한편 이몽학은 그의 부하인 김경창, 임억명(林億命), 태근(太斤) 등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난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을 세운 홍가신 목사 등 다섯 명에게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을 책록하였다.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행․임득의가 책록되었다. 이들 다섯 명의 공신은 현재 내포 지역의 중심지인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 홍가신사당에 모셔져 있다.

한편 홍가신 목사가 선정을 베풀고 홍주를 떠난 뒤 홍주읍성에는 각종 질병이 해마다 끊이지 않는 등 괴변이 잇달아 일어나자 이를 방지하고 그를 사모하는 뜻에서 홍주의 주산(主山)인 백월산에 그분의 목상을 세우고 성안의 사람들이 해마다 제를 지냈다. 그러고 나서 각종 질병이 사라지고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는 1641년(인조 19)에 김광현(金光鉉, 1584~1647)이 건립한 청난비(淸難碑, 충남 문화재자료 제165호)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는 “공(公)이 돌아가신 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 공의 충정은 더욱 빛난다. 홍주 사람들이 그 덕(德)을 사모하여 [사당](/topic/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노라. 백월산의 양지쪽 소나무 [기둥](/topic/기둥)에 잣나무 판자 신령을 모시고 그 앞에 제기를 늘어놓으니 [가지](/topic/가지) 붉고, 파초열매 누렇구나”라고 청난비에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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