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호두

한국무속신앙사전
호랑이 머리를 침수시키는 기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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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머리를 침수시키는 기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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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성
정의호랑이 머리를 침수시키는 기우법.
정의호랑이 머리를 침수시키는 기우법.
내용침호두는 용의 형상물을 만들거나 용을 대신하는 생물체를 동원하지 않은 채 용이 거하는 처소에 호랑이 머리를 집어넣어 용호상박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잠연해 있는 용을 승천하도록 자극하는 의례이다. 이에 따라 호두(虎頭)는 용신을 위무하는 [희생제물](/topic/희생제물)이라기보다 용신을 자극하는 대항적 주물(呪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용의 움직임에 따라 구름도 일어난다는 믿음을 전제로 부동의 잠룡을 일으키기 위해 용이 선호하는 것으로 유인, 용이 꺼리는 것으로 위협, 용의 처소를 더럽히는 부정화의 방식 등이 기우제로 활용되었다. 침호두는 용이 꺼리는 적대적인 맹수를 이용해 위협하는 두 번째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오잡조(五雜組)』 권9 물부(物部)1에는 “사나운 [동물](/topic/동물)들은 서로 가까이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수중에 잠겨 있는 용에게 호랑이 머리를 투척하면 반드시 용이 경악과 분노로 용솟음친다. 그래서 이미 서역인들은 [우물](/topic/우물) 옆 나무에 사자를 매달아 바치기도 한다. 사자는 곧 이리저리 움직이며 괴로워한다. 잠시 뒤에 비바람이 불고 어두워지면서 용이 우물로부터 날아오른다. 이는 사자와 용이 서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랑이(虎頭, 虎骨) 또는 사자가 용을 위협하는 맹수로 이용될 수 있었겠지만 동아시아의 기우제 전통에서는 호두(虎頭)가 활용되었다.

침호두의 기우법은 1416년(태종 16)의 사례에서 등장한다. 당시 침호두를 거행한 장소는 한강이었으며, 이후에는 한강 이외에 박연(朴淵)과 양진(楊津)에서도 거행되었다. 조선 전기에 이미 한강․양진․박연 등지에서 국행기우제의 일환으로 침호두를 실행하는 것이 공식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용지(龍池), 용연(龍淵), 용소(龍沼), 용추(龍湫), 용택(龍澤) 등지에서도 침호두가 거행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밀양의 구연(臼淵), 함안의 도장연(道場淵), 은산 진악산(進樂山)의 석혈(石穴), 고산의 용연, 홍천 가리산(加里山)의 용연, 맹산의 원지(圓池) 등지에서도 가물 때 침호두를 거행하였다.

조선 후기에 확립된 국행기우제의 12제차 가운데 제6차에 한강의 침호두가 편제된 이래 조선 말까지 한강의 침호두가 지속적으로 거행되었으며, 20세기 초엽까지도 지방의 용추에서 침호두를 설행한 사례가 『기어(紀語)』 1928년 7월 10일 기록에서 확인된다.

침호두에 쓸 호랑이를 단시간에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혹 호랑이를 구할 수 없을 경우 이미 사용한 썩은 호두를 다시 쓰기도 했으나 제물을 경건하게 준비하는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침호두에 사용하는 호랑이 머리는 용신을 위협하는 매개물이지만 유교 입장에서는 그것을 정성스럽게 준비한 경건한 희생제물로 간주하려 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토룡기우, 화룡기우, [석척기우](/topic/석척기우) 등이 의례경건주의 입장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축소되거나 개정된 것에 비해 침호두는 국가와 지방의 기우제에서 한발을 타개하는 기우법으로 지속되었다.
참고문헌[석전·기우·[안택](/topic/안택)](/topic/석전·기우·안택) (조선총독부, 1938)
祈雨祭謄錄, 국행기우제와 민간기우제의 비교연구 (최종성, 종교학연구 16,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1997)
용부림과 용부림꾼-용과 기우제 (최종성, 민속학연구 6, 국립민속박물관, 1999)
[기우[제등](/topic/제등)록](/topic/기우제등록)과 [기후](/topic/기후)의례 (최종성,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내용침호두는 용의 형상물을 만들거나 용을 대신하는 생물체를 동원하지 않은 채 용이 거하는 처소에 호랑이 머리를 집어넣어 용호상박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잠연해 있는 용을 승천하도록 자극하는 의례이다. 이에 따라 호두(虎頭)는 용신을 위무하는 [희생제물](/topic/희생제물)이라기보다 용신을 자극하는 대항적 주물(呪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용의 움직임에 따라 구름도 일어난다는 믿음을 전제로 부동의 잠룡을 일으키기 위해 용이 선호하는 것으로 유인, 용이 꺼리는 것으로 위협, 용의 처소를 더럽히는 부정화의 방식 등이 기우제로 활용되었다. 침호두는 용이 꺼리는 적대적인 맹수를 이용해 위협하는 두 번째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오잡조(五雜組)』 권9 물부(物部)1에는 “사나운 [동물](/topic/동물)들은 서로 가까이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수중에 잠겨 있는 용에게 호랑이 머리를 투척하면 반드시 용이 경악과 분노로 용솟음친다. 그래서 이미 서역인들은 [우물](/topic/우물) 옆 나무에 사자를 매달아 바치기도 한다. 사자는 곧 이리저리 움직이며 괴로워한다. 잠시 뒤에 비바람이 불고 어두워지면서 용이 우물로부터 날아오른다. 이는 사자와 용이 서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랑이(虎頭, 虎骨) 또는 사자가 용을 위협하는 맹수로 이용될 수 있었겠지만 동아시아의 기우제 전통에서는 호두(虎頭)가 활용되었다.

침호두의 기우법은 1416년(태종 16)의 사례에서 등장한다. 당시 침호두를 거행한 장소는 한강이었으며, 이후에는 한강 이외에 박연(朴淵)과 양진(楊津)에서도 거행되었다. 조선 전기에 이미 한강․양진․박연 등지에서 국행기우제의 일환으로 침호두를 실행하는 것이 공식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용지(龍池), 용연(龍淵), 용소(龍沼), 용추(龍湫), 용택(龍澤) 등지에서도 침호두가 거행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밀양의 구연(臼淵), 함안의 도장연(道場淵), 은산 진악산(進樂山)의 석혈(石穴), 고산의 용연, 홍천 가리산(加里山)의 용연, 맹산의 원지(圓池) 등지에서도 가물 때 침호두를 거행하였다.

조선 후기에 확립된 국행기우제의 12제차 가운데 제6차에 한강의 침호두가 편제된 이래 조선 말까지 한강의 침호두가 지속적으로 거행되었으며, 20세기 초엽까지도 지방의 용추에서 침호두를 설행한 사례가 『기어(紀語)』 1928년 7월 10일 기록에서 확인된다.

침호두에 쓸 호랑이를 단시간에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혹 호랑이를 구할 수 없을 경우 이미 사용한 썩은 호두를 다시 쓰기도 했으나 제물을 경건하게 준비하는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침호두에 사용하는 호랑이 머리는 용신을 위협하는 매개물이지만 유교 입장에서는 그것을 정성스럽게 준비한 경건한 희생제물로 간주하려 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토룡기우, 화룡기우, [석척기우](/topic/석척기우) 등이 의례경건주의 입장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축소되거나 개정된 것에 비해 침호두는 국가와 지방의 기우제에서 한발을 타개하는 기우법으로 지속되었다.
참고문헌[석전·기우·[안택](/topic/안택)](/topic/석전·기우·안택) (조선총독부, 1938)
祈雨祭謄錄, 국행기우제와 민간기우제의 비교연구 (최종성, 종교학연구 16,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1997)
용부림과 용부림꾼-용과 기우제 (최종성, 민속학연구 6, 국립민속박물관, 1999)
[기우[제등](/topic/제등)록](/topic/기우제등록)과 [기후](/topic/기후)의례 (최종성,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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