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홍성군 결성읍 옹암리에서 매년 음력 정초에 행하는 [마을](/topic/마을)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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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황인덕 |
정의 | 홍성군 결성읍 옹암리에서 매년 음력 정초에 행하는 [마을](/topic/마을)제사. | 정의 | 홍성군 결성읍 옹암리에서 매년 음력 정초에 행하는 [마을](/topic/마을)제사. | 내용 |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미리 섣달 스무날에 동회를 열어 [제관](/topic/제관)을 정한다. 제관은 당주, 도화주, 부화주, 전화주, 무당(당할머니)으로 구성된다. 당주는 당산제의 총책임자로서 [제물](/topic/제물)을 마련하고 산제당에서 유교식 제의를 주도한다. 도화주는 당산제를 전체적으로 기획하며 건립을 주로 책임진다. 부화주는 도화주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전화주는 회계 책임자이고, 무당은 실질적으로 제를 주관한다. 축관은 제관 가운데에서 임의로 뽑는다. 제관으로 뽑힌 사람들은 제의 기간에 몸가짐을 매우 조심하여 부정한 일을 보거나 행하지 말아야 한다. 제관 집 [대문](/topic/대문) 앞에 [황토](/topic/황토)를 뿌려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는 것은 물론 정초의 집안 차례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마을](/topic/마을)에 해산할 사람이 있으면 미리 다른 마을로 피신케 한다. 그러나 부득이 마을에 초상이 난 경우에는 그대로 진행하였다. 산제당에도 [금줄](/topic/금줄)을 걸어 부정의 침입을 엄격하게 막고자 했다. 예전에 산제당 주변 밭에 뒷거름을 주고 나서 병이 들어 죽은 사람이 있었고, 당산 주변의 사유지에서 베어낸 고목들을 화목으로 이용한 옹[기장](/topic/기장)이 느닷없이 망한 일이 있었다. 주민들은 이 일들을 모두 [신벌](/topic/신벌)의 결과로 여기고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의 당산제에 대한 강한 부정 금기를 보여 주는 예이다. 옹암리의 당산제는 대략 옹암포구의 기능이 잘 유지되고 선주들의 후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던 1960년대를 분기점으로 하여 포구 기능이 쇠퇴하고 소멸된 현재에 이르기까지 쇠퇴, 단절, 부활의 기복을 겪어 왔다. 이처럼 이곳 당산제의 전후 단계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주민들은 잘 인식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전 단계 당산제의 흥성했던 모습을 중시하여 1960년대 이전 단계를 대제(大祭), 그 이후의 굴절되고 쇠퇴한 단계의 양상을 소제(小祭)라고 각각 부르기도 한다. 이에 따라 대제를 중심으로 당산제 과정을 서술하고 바뀐 모습도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전체 당산제는 크게 걸립 과정과 제의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걸립은 음력 정월 초이튿날부터 초닷샛날까지 계속했다. 집집마다 [걸립패](/topic/걸립패)가 방문하여 [고사](/topic/고사) 걸립을 했다. 이때 걸립되는 쌀은 적으면 몇 되, 많으면 몇 말 정도였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는 걸립패를 집에 들이지 않고 간단히 돈 몇 푼을 내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걸립은 배에 올라가서도 했다. 걸립미(또는 돈)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걷은 것보다 배걸립으로 걷은 것이 늘 곱절 이상 많아 선주들의 후원은 당산제를 지냄에 있어 매우 긴요했다. 특히 그해 어황이 좋으면 제물로 소를 잡았고, 제를 더욱 성대하게 지내고자 기량이 뛰어난 풍물꾼과 전문 [광[대패](/topic/대패)](/topic/광대패)를 불러오고, 무당을 더 많이 데려오기도 했다. 이들은 제의 기간에 산제당 주변과 마을 넓은 길에서 낮밤으로 화려한 기예를 시연하여 주민들의 시선을 끌고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들에게는 품삯을 후하게 주었다. 본격적인 당제는 정월 초엿샛날 저녁에 산제당에서 시작한다. 이날 저녁이 되면 제의를 주관하는 제관, 즉 삼소임(三所任, 당주․도화주․무당)이 당주의 집을 출발하여 용대기와 [뱃기](/topic/뱃기) 및 풍물패를 앞세우고 신수(神樹)와 당집이 있는 당산으로 올라간다. 당산에 오른 뱃기 [기수](/topic/기수)들은 용대기 기수를 따라 신수 주위를 다섯 바퀴 돌고 나서 기를 일렬로 꽂아 둔다. 그런 다음 무당이 나무 앞에 제물을 차려 놓고 징을 치며 간단히 [부정풀이](/topic/부정풀이) 축원을 한다. 한편 당주와 도화주는 신수 부근의 당집으로 들어가 술, 포, 삼색실과, 미역국, 메로 이루어진 제물을 진설하고서 산신․당할아버지․당할머니에게 유교식 제를 지낸다. 이때 읽는 축(祝)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내용이 약간 더해진 것 외에 일반적인 내용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 제의가 끝나면 다시 무당이 이들 신을 향하여 각각 고사 치성을 드린다. 그러고 나서 다시 뱃기(선주)를 향하여 어망굿과 선주굿을 한다. 이어서 각각의 뱃기에 공수를 내려주고 풍어를 기원하는 축원을 해 준다. 이로 볼 때 옹암리당산제의 제의는 전체적으로 배와 선주에 대한 관심이 크고 비중이 높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마을 주민들에 대한 소지(燒紙) 과정이 이어진다. 개별소지를 다 올려주고 나면 시간이 많이 지나 새벽녘이 된다. 소지가 끝나면 제관 일행은 하산하여 새벽잠을 자고서 오전에 다시 당산으로 올라가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낸다. 고사가 끝나면 마을로 내려와 장승제와 [거리제](/topic/거리제)를 지낸다. 장승제와 거리제에서는 당주가 따로 있고 음식도 별도로 마련하였다. 상거리, 중거리, 하거리 가운데 장승이 있는 광남초등학교에 위치한 상거리에서 먼저 장승제를 지낸다. 이어서 경로당이 있는 중거리와 바닷가에 가까운 하거리 순으로 거리제를 지낸다. 상거리에서의 장승제는 위치상으로 거리제 성격을 함께 띤다고 할 수 있다. 거리제 [축문](/topic/축문) 내용은 세 곳 모두 동일하다. 이튿날 저녁에 다시 ‘삼일맞이’라 하여 무당이 당산에 올라가 마지막 고사를 새벽까지 올린다. 삼일맞이는 초사흘째 지내는 제사를 뜻하는 말인 듯하다. 제의가 다 끝나고 나면 결산을 한다. 이때 제관, 심부름꾼, 초청된 풍물꾼과 전문 놀이꾼 등에게 적절한 수준의 수당을 준다. 남은 예산은 마을 기금으로 적립한다. 옹암리는 근래 포구로써의 기능을 잃고 마을세도 크게 위축된 데다 교회까지 생겨 당산제에 대한 의식과 관심도가 전에 비하여 많이 약해졌다. 또한 마을노인회 회원들과 뜻있는 일부 주민들에 의한 자발적인 성금으로 당제의 비용을 충당하다 보니 제의의 규모, 내용, 기간 등 여러 면에서 크게 축소된 상태로 운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을의 성격이 급속히 바뀜에 따라 마을 제사의 기능과 내용도 함께 바뀐 적례가 옹암리당산제라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 조세금 면담(2010년 6월 28일) 자료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의 당제 분석 (박종익, 어문연구 57, 어문연구학회, 2008) 홍성 독배[마을](/topic/마을)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 대원사, 2008) | 내용 |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미리 섣달 스무날에 동회를 열어 [제관](/topic/제관)을 정한다. 제관은 당주, 도화주, 부화주, 전화주, 무당(당할머니)으로 구성된다. 당주는 당산제의 총책임자로서 [제물](/topic/제물)을 마련하고 산제당에서 유교식 제의를 주도한다. 도화주는 당산제를 전체적으로 기획하며 건립을 주로 책임진다. 부화주는 도화주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전화주는 회계 책임자이고, 무당은 실질적으로 제를 주관한다. 축관은 제관 가운데에서 임의로 뽑는다. 제관으로 뽑힌 사람들은 제의 기간에 몸가짐을 매우 조심하여 부정한 일을 보거나 행하지 말아야 한다. 제관 집 [대문](/topic/대문) 앞에 [황토](/topic/황토)를 뿌려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는 것은 물론 정초의 집안 차례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마을](/topic/마을)에 해산할 사람이 있으면 미리 다른 마을로 피신케 한다. 그러나 부득이 마을에 초상이 난 경우에는 그대로 진행하였다. 산제당에도 [금줄](/topic/금줄)을 걸어 부정의 침입을 엄격하게 막고자 했다. 예전에 산제당 주변 밭에 뒷거름을 주고 나서 병이 들어 죽은 사람이 있었고, 당산 주변의 사유지에서 베어낸 고목들을 화목으로 이용한 옹[기장](/topic/기장)이 느닷없이 망한 일이 있었다. 주민들은 이 일들을 모두 [신벌](/topic/신벌)의 결과로 여기고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의 당산제에 대한 강한 부정 금기를 보여 주는 예이다. 옹암리의 당산제는 대략 옹암포구의 기능이 잘 유지되고 선주들의 후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던 1960년대를 분기점으로 하여 포구 기능이 쇠퇴하고 소멸된 현재에 이르기까지 쇠퇴, 단절, 부활의 기복을 겪어 왔다. 이처럼 이곳 당산제의 전후 단계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주민들은 잘 인식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전 단계 당산제의 흥성했던 모습을 중시하여 1960년대 이전 단계를 대제(大祭), 그 이후의 굴절되고 쇠퇴한 단계의 양상을 소제(小祭)라고 각각 부르기도 한다. 이에 따라 대제를 중심으로 당산제 과정을 서술하고 바뀐 모습도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전체 당산제는 크게 걸립 과정과 제의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걸립은 음력 정월 초이튿날부터 초닷샛날까지 계속했다. 집집마다 [걸립패](/topic/걸립패)가 방문하여 [고사](/topic/고사) 걸립을 했다. 이때 걸립되는 쌀은 적으면 몇 되, 많으면 몇 말 정도였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는 걸립패를 집에 들이지 않고 간단히 돈 몇 푼을 내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걸립은 배에 올라가서도 했다. 걸립미(또는 돈)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걷은 것보다 배걸립으로 걷은 것이 늘 곱절 이상 많아 선주들의 후원은 당산제를 지냄에 있어 매우 긴요했다. 특히 그해 어황이 좋으면 제물로 소를 잡았고, 제를 더욱 성대하게 지내고자 기량이 뛰어난 풍물꾼과 전문 [광[대패](/topic/대패)](/topic/광대패)를 불러오고, 무당을 더 많이 데려오기도 했다. 이들은 제의 기간에 산제당 주변과 마을 넓은 길에서 낮밤으로 화려한 기예를 시연하여 주민들의 시선을 끌고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들에게는 품삯을 후하게 주었다. 본격적인 당제는 정월 초엿샛날 저녁에 산제당에서 시작한다. 이날 저녁이 되면 제의를 주관하는 제관, 즉 삼소임(三所任, 당주․도화주․무당)이 당주의 집을 출발하여 용대기와 [뱃기](/topic/뱃기) 및 풍물패를 앞세우고 신수(神樹)와 당집이 있는 당산으로 올라간다. 당산에 오른 뱃기 [기수](/topic/기수)들은 용대기 기수를 따라 신수 주위를 다섯 바퀴 돌고 나서 기를 일렬로 꽂아 둔다. 그런 다음 무당이 나무 앞에 제물을 차려 놓고 징을 치며 간단히 [부정풀이](/topic/부정풀이) 축원을 한다. 한편 당주와 도화주는 신수 부근의 당집으로 들어가 술, 포, 삼색실과, 미역국, 메로 이루어진 제물을 진설하고서 산신․당할아버지․당할머니에게 유교식 제를 지낸다. 이때 읽는 축(祝)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내용이 약간 더해진 것 외에 일반적인 내용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 제의가 끝나면 다시 무당이 이들 신을 향하여 각각 고사 치성을 드린다. 그러고 나서 다시 뱃기(선주)를 향하여 어망굿과 선주굿을 한다. 이어서 각각의 뱃기에 공수를 내려주고 풍어를 기원하는 축원을 해 준다. 이로 볼 때 옹암리당산제의 제의는 전체적으로 배와 선주에 대한 관심이 크고 비중이 높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마을 주민들에 대한 소지(燒紙) 과정이 이어진다. 개별소지를 다 올려주고 나면 시간이 많이 지나 새벽녘이 된다. 소지가 끝나면 제관 일행은 하산하여 새벽잠을 자고서 오전에 다시 당산으로 올라가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낸다. 고사가 끝나면 마을로 내려와 장승제와 [거리제](/topic/거리제)를 지낸다. 장승제와 거리제에서는 당주가 따로 있고 음식도 별도로 마련하였다. 상거리, 중거리, 하거리 가운데 장승이 있는 광남초등학교에 위치한 상거리에서 먼저 장승제를 지낸다. 이어서 경로당이 있는 중거리와 바닷가에 가까운 하거리 순으로 거리제를 지낸다. 상거리에서의 장승제는 위치상으로 거리제 성격을 함께 띤다고 할 수 있다. 거리제 [축문](/topic/축문) 내용은 세 곳 모두 동일하다. 이튿날 저녁에 다시 ‘삼일맞이’라 하여 무당이 당산에 올라가 마지막 고사를 새벽까지 올린다. 삼일맞이는 초사흘째 지내는 제사를 뜻하는 말인 듯하다. 제의가 다 끝나고 나면 결산을 한다. 이때 제관, 심부름꾼, 초청된 풍물꾼과 전문 놀이꾼 등에게 적절한 수준의 수당을 준다. 남은 예산은 마을 기금으로 적립한다. 옹암리는 근래 포구로써의 기능을 잃고 마을세도 크게 위축된 데다 교회까지 생겨 당산제에 대한 의식과 관심도가 전에 비하여 많이 약해졌다. 또한 마을노인회 회원들과 뜻있는 일부 주민들에 의한 자발적인 성금으로 당제의 비용을 충당하다 보니 제의의 규모, 내용, 기간 등 여러 면에서 크게 축소된 상태로 운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을의 성격이 급속히 바뀜에 따라 마을 제사의 기능과 내용도 함께 바뀐 적례가 옹암리당산제라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 조세금 면담(2010년 6월 28일) 자료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의 당제 분석 (박종익, 어문연구 57, 어문연구학회, 2008) 홍성 독배[마을](/topic/마을)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 대원사, 2008) | 역사 | 옹암리는 뒤에 야트막한 야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작은 바다에 면한 조그마한 농촌 포구 [마을](/topic/마을)이다. 평범해 보이는 마을의 입지 조건과 크기에 비할 때 이 마을의 당산제는 규모가 비교적 크고 성대한 편이다. 이러한 특징은 바로 이 마을의 당산제가 옹암리의 발전 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맺어 왔음을 말해 준다. 옹암리는 오천에서 연결된 천수만의 내륙 종점이자 어선이 마지막으로 정박하는 곳이다. 옹암리와 인접한 광천읍이 서해 해산물의 중심 장시로 발달한 소도시라면 옹암리는 서해 해산물을 하역하여 광천 장에 공급함으로써 광천의 인후부 역할을 한다. 옹암 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4월 9일이 광천 장이라면 4월 8일은 자연히 옹암 장이 되고, 광천 장이 본(本) 장이라면 옹암 장은 예비 장이 되는 셈이다. 포구로서의 기능이 중요시되면서 옹암리에는 늘 어로 종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광천 장 전날에는 미리 해물을 사 두려고 모여든 1,000여 명의 장사꾼들로 늘 거리가 붐볐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내륙 쪽에서 밀려든 토사 때문에 포구의 하상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옹암리의 포구 기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마침내 1975년에 폐항 조치가 내려져 옹암포는 존재 의미마저 잃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때 375가구이던 마을 주민은 현재 절반으로 대폭 줄었으며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던 제사 기간도 크게 단축되고 제의 절차도 간소화되었다. 게다가 마을에 교회가 생기면서 당산제는 더욱 위축되었고 1976년에 산신도를 도난당하는 사고마저 발생함으로써 전승이 단절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이후 마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상사가 빈발하게 되자 이에 대응하려는 목적에서 옹암리 노인회가 주도하여 1985년에 신당집을 짓고 단절된 당산제를 복원하여 계승하고 있다. | 역사 | 옹암리는 뒤에 야트막한 야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작은 바다에 면한 조그마한 농촌 포구 [마을](/topic/마을)이다. 평범해 보이는 마을의 입지 조건과 크기에 비할 때 이 마을의 당산제는 규모가 비교적 크고 성대한 편이다. 이러한 특징은 바로 이 마을의 당산제가 옹암리의 발전 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맺어 왔음을 말해 준다. 옹암리는 오천에서 연결된 천수만의 내륙 종점이자 어선이 마지막으로 정박하는 곳이다. 옹암리와 인접한 광천읍이 서해 해산물의 중심 장시로 발달한 소도시라면 옹암리는 서해 해산물을 하역하여 광천 장에 공급함으로써 광천의 인후부 역할을 한다. 옹암 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4월 9일이 광천 장이라면 4월 8일은 자연히 옹암 장이 되고, 광천 장이 본(本) 장이라면 옹암 장은 예비 장이 되는 셈이다. 포구로서의 기능이 중요시되면서 옹암리에는 늘 어로 종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광천 장 전날에는 미리 해물을 사 두려고 모여든 1,000여 명의 장사꾼들로 늘 거리가 붐볐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내륙 쪽에서 밀려든 토사 때문에 포구의 하상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옹암리의 포구 기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마침내 1975년에 폐항 조치가 내려져 옹암포는 존재 의미마저 잃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때 375가구이던 마을 주민은 현재 절반으로 대폭 줄었으며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던 제사 기간도 크게 단축되고 제의 절차도 간소화되었다. 게다가 마을에 교회가 생기면서 당산제는 더욱 위축되었고 1976년에 산신도를 도난당하는 사고마저 발생함으로써 전승이 단절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이후 마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상사가 빈발하게 되자 이에 대응하려는 목적에서 옹암리 노인회가 주도하여 1985년에 신당집을 짓고 단절된 당산제를 복원하여 계승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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