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온평리포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의 유교식 [마을](/topic/마을)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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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의 유교식 [마을](/topic/마을)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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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의 유교식 [마을](/topic/마을)제사.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의 유교식 [마을](/topic/마을)제사.
내용온평리포제는 ‘큰제’와 ‘별제’로 나뉜다. 큰제에서는 토지지신(土地之神), 별제에서는 본향지신(本鄕之神)을 각각 모신다. 큰제는 홀기에 따라 [제관](/topic/제관)들이 모두 참여하지만 별제는 [초헌](/topic/초헌)관과 대축만이 가서 단헌[단작](/topic/단작)으로 간단히 지낸다.

제장인 포제단 주변에는 [돌담](/topic/돌담)을 쌓았으며, 주위에 나무와 잡풀이 우거져 있다. 큰제와 별제를 지내는 제단은 넓적한 바위를 이용하여 각각 따로 마련하였다. 큰제의 제단이 좀 더 크고, 별제의 제단은 큰제 제단의 왼쪽에 다소 작게 설치하였다.

제일은 포제의 일반적인 선정 기준인 ‘혹정혹해(或丁或亥)’에 따르지 않고 [지관](/topic/지관)에게 가서 적절한 날로 택일하여 선정한다. 정월이 지나지 않도록 택일하고, 시간은 자시(子時)를 기준으로 한다. 입재(入齋)하기 전에 [마을](/topic/마을)에 상이 나면 포제는 연기하고 입재 뒤에 상을 당하면 그냥 진행한다. 입재한 이후에 부정을 당하지 않도록 더욱 명심한다.

포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이장이 마을회의를 소집한다. 이를 포제향회(酺祭鄕會)라고 부른다. 포제향회에는 마을의 가구당 남자가 한 명 참석한다. 이때 상을 당하였다든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사람은 참석하지 않는다. 즉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향회에서는 제관을 선출하고 제향비(祭享費) 규모를 결정한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일정한 분량의 쌀을 모아 제비를 충당하였지만 현재는 마을기금과 부조비를 활용한다.

제관은 일정 기간 마을에 거주하고, 부정한 일을 당하지 않았으며, 연령이 좀 있고 덕망 있는 주민 가운데에서 선출한다. 예전에 제관이 많은 때에는 18제관이었으나 지금은 6제관이 제를 지낸다. 6제관은 초헌관(初獻官), [아헌](/topic/아헌)관(亞獻官), [종헌](/topic/종헌)관(終獻官), 대축(大祝), 집례(執禮), 알자(謁者) 등이다.

제물은 유식제례(儒式祭禮)의 [진설법](/topic/진설법)을 따른다. 곡류로는 도(稻), 양(粱), 서(黍), 직(稷)을 올리는 게 원칙이다. 여기에 폐백(幣帛), 실과(實果), 제주(祭酒), 녹포(鹿脯), 채소(菜蔬), 해어(海魚) 등을 마련한다. 적절한 해당 제물을 구하기 어려우면 대용을 사용한다. 희생(犧牲)으로는 소 한 마리를 쓴다. [제상](/topic/제상)에 올라가는 부분은 등심 부분이다. 나머지는 제상 옆에 따로 놓아둔다. 희생으로 소를 쓰는 이유는 마을 본향당신이 돼지고기를 부정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 값이 비싸기 때문에 비교적 작은 소를 택하여 잡는다.

포제를 위한 준비가 끝나면 제관들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제관에 선출되면 제관의 집에는 [금줄](/topic/금줄)이 쳐지고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된다. 포제 사흘 전에는 제관들이 모두 포제청에 모여 합숙하며 [재계](/topic/재계)(齋戒)하게 된다. 예전에는 따로 포제청이 없어 주민들 가운데 부정하지 않고 포제단과 가까운 집을 골라 ‘제청집’으로 선정하여 지냈다. 하지만 1996년에 마을노인회관이 지어지고 나서 그 이듬해부터는 노인회관을 포제청으로 사용하였다. 제기(祭器)와 필요물품도 공동으로 마련해 놓았다. 포제청에는 금줄을 쳐서 잡인들의 접근을 막는다. 제관들은 포제가 끝날 때까지 합숙하며 식사 등을 제공받는다. 제관들은 포제를 위해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련해 놓은 청금(靑衿)과 [유건](/topic/유건)(儒巾) 등 [제복](/topic/제복)을 갖추어 입는다. 포제 하루 전날에는 예행연습을 충분히 하여 둔다.

포제는 포제단에서 해당 제관과 마을 유지, 부정하지 않은 남자 마을 주민들이 함께 지낸다. 이때 제물 준비를 맡은 여자를 뺀 여자는 원칙적으로 포제에 참여할 수 없다. 또한 돼지고기를 먹은 이는 참여할 수 없다. 본향당신이 돼지고기를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정월이어서 날씨가 춥기 때문에 참여하는 이가 많은 편은 아니다. 포제의 행제(行祭)는 홀기(笏記)에 따라 전폐례(奠幣禮)-초헌례(初獻禮)-아헌례(亞獻禮)-종헌례(終獻禮)-철변두(撤邊豆)-망료(望燎) 순서로 진행된다. [축문](/topic/축문)은 해마다 새로 마련하며,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다만 그해에 특별히 기원하고자 하는 사항이 있으면 추가한다. 포제가 끝나면 포제단에서 간단히 [음복](/topic/음복)한 뒤에 포제청으로 돌아와 다시 함께 모여 앉아 나누어 먹는다.

한편 온평리에서는 포제를 지낸 뒤에 날이 밝기를 기다려 포제단 근처의 본향당에서 심방이 무속식으로 당굿을 한다. 이를 ‘포젯굿’이라고 부른다. 포제의 삼헌관도 당굿에 참여한다.
내용온평리포제는 ‘큰제’와 ‘별제’로 나뉜다. 큰제에서는 토지지신(土地之神), 별제에서는 본향지신(本鄕之神)을 각각 모신다. 큰제는 홀기에 따라 [제관](/topic/제관)들이 모두 참여하지만 별제는 [초헌](/topic/초헌)관과 대축만이 가서 단헌[단작](/topic/단작)으로 간단히 지낸다.

제장인 포제단 주변에는 [돌담](/topic/돌담)을 쌓았으며, 주위에 나무와 잡풀이 우거져 있다. 큰제와 별제를 지내는 제단은 넓적한 바위를 이용하여 각각 따로 마련하였다. 큰제의 제단이 좀 더 크고, 별제의 제단은 큰제 제단의 왼쪽에 다소 작게 설치하였다.

제일은 포제의 일반적인 선정 기준인 ‘혹정혹해(或丁或亥)’에 따르지 않고 [지관](/topic/지관)에게 가서 적절한 날로 택일하여 선정한다. 정월이 지나지 않도록 택일하고, 시간은 자시(子時)를 기준으로 한다. 입재(入齋)하기 전에 [마을](/topic/마을)에 상이 나면 포제는 연기하고 입재 뒤에 상을 당하면 그냥 진행한다. 입재한 이후에 부정을 당하지 않도록 더욱 명심한다.

포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이장이 마을회의를 소집한다. 이를 포제향회(酺祭鄕會)라고 부른다. 포제향회에는 마을의 가구당 남자가 한 명 참석한다. 이때 상을 당하였다든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사람은 참석하지 않는다. 즉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향회에서는 제관을 선출하고 제향비(祭享費) 규모를 결정한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일정한 분량의 쌀을 모아 제비를 충당하였지만 현재는 마을기금과 부조비를 활용한다.

제관은 일정 기간 마을에 거주하고, 부정한 일을 당하지 않았으며, 연령이 좀 있고 덕망 있는 주민 가운데에서 선출한다. 예전에 제관이 많은 때에는 18제관이었으나 지금은 6제관이 제를 지낸다. 6제관은 초헌관(初獻官), [아헌](/topic/아헌)관(亞獻官), [종헌](/topic/종헌)관(終獻官), 대축(大祝), 집례(執禮), 알자(謁者) 등이다.

제물은 유식제례(儒式祭禮)의 [진설법](/topic/진설법)을 따른다. 곡류로는 도(稻), 양(粱), 서(黍), 직(稷)을 올리는 게 원칙이다. 여기에 폐백(幣帛), 실과(實果), 제주(祭酒), 녹포(鹿脯), 채소(菜蔬), 해어(海魚) 등을 마련한다. 적절한 해당 제물을 구하기 어려우면 대용을 사용한다. 희생(犧牲)으로는 소 한 마리를 쓴다. [제상](/topic/제상)에 올라가는 부분은 등심 부분이다. 나머지는 제상 옆에 따로 놓아둔다. 희생으로 소를 쓰는 이유는 마을 본향당신이 돼지고기를 부정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 값이 비싸기 때문에 비교적 작은 소를 택하여 잡는다.

포제를 위한 준비가 끝나면 제관들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제관에 선출되면 제관의 집에는 [금줄](/topic/금줄)이 쳐지고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된다. 포제 사흘 전에는 제관들이 모두 포제청에 모여 합숙하며 [재계](/topic/재계)(齋戒)하게 된다. 예전에는 따로 포제청이 없어 주민들 가운데 부정하지 않고 포제단과 가까운 집을 골라 ‘제청집’으로 선정하여 지냈다. 하지만 1996년에 마을노인회관이 지어지고 나서 그 이듬해부터는 노인회관을 포제청으로 사용하였다. 제기(祭器)와 필요물품도 공동으로 마련해 놓았다. 포제청에는 금줄을 쳐서 잡인들의 접근을 막는다. 제관들은 포제가 끝날 때까지 합숙하며 식사 등을 제공받는다. 제관들은 포제를 위해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련해 놓은 청금(靑衿)과 [유건](/topic/유건)(儒巾) 등 [제복](/topic/제복)을 갖추어 입는다. 포제 하루 전날에는 예행연습을 충분히 하여 둔다.

포제는 포제단에서 해당 제관과 마을 유지, 부정하지 않은 남자 마을 주민들이 함께 지낸다. 이때 제물 준비를 맡은 여자를 뺀 여자는 원칙적으로 포제에 참여할 수 없다. 또한 돼지고기를 먹은 이는 참여할 수 없다. 본향당신이 돼지고기를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정월이어서 날씨가 춥기 때문에 참여하는 이가 많은 편은 아니다. 포제의 행제(行祭)는 홀기(笏記)에 따라 전폐례(奠幣禮)-초헌례(初獻禮)-아헌례(亞獻禮)-종헌례(終獻禮)-철변두(撤邊豆)-망료(望燎) 순서로 진행된다. [축문](/topic/축문)은 해마다 새로 마련하며,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다만 그해에 특별히 기원하고자 하는 사항이 있으면 추가한다. 포제가 끝나면 포제단에서 간단히 [음복](/topic/음복)한 뒤에 포제청으로 돌아와 다시 함께 모여 앉아 나누어 먹는다.

한편 온평리에서는 포제를 지낸 뒤에 날이 밝기를 기다려 포제단 근처의 본향당에서 심방이 무속식으로 당굿을 한다. 이를 ‘포젯굿’이라고 부른다. 포제의 삼헌관도 당굿에 참여한다.
역사온평리의 포제(酺祭)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 제주도의 향촌사회에 유교의례가 보급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포제를 지내게 되면서 남자들이 맡아서 하는 유식(儒式) 포제와 여자들이 주축이 되는 무식(巫式) 당굿으로 [마을](/topic/마을)제사가 이원화되었다. 하지만 모두 마을의 안녕과 [생업](/topic/생업)의 풍요를 위하는 의례이다. 특히 온평리에서는 포제에 이어 본향당에서 ‘포젯굿’을 하고 있어 유식 마을제와 무식 마을제의 양상을 잘 살필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한편 포제단은 예전에는 온평초등학교 옆에 있었으나 너무 일주도로 변에 있다고 여겨 1900년대 중반에 해안 쪽의 속칭 ‘진동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온평리본향당에서 조금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포제단이 있다.
역사온평리의 포제(酺祭)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 제주도의 향촌사회에 유교의례가 보급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포제를 지내게 되면서 남자들이 맡아서 하는 유식(儒式) 포제와 여자들이 주축이 되는 무식(巫式) 당굿으로 [마을](/topic/마을)제사가 이원화되었다. 하지만 모두 마을의 안녕과 [생업](/topic/생업)의 풍요를 위하는 의례이다. 특히 온평리에서는 포제에 이어 본향당에서 ‘포젯굿’을 하고 있어 유식 마을제와 무식 마을제의 양상을 잘 살필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한편 포제단은 예전에는 온평초등학교 옆에 있었으나 너무 일주도로 변에 있다고 여겨 1900년대 중반에 해안 쪽의 속칭 ‘진동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온평리본향당에서 조금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포제단이 있다.
지역사례제주도 전역에서 현재까지 포제를 지내는 [마을](/topic/마을)이 여럿 남아 있다. 마을에 따라서는 [농포제](/topic/농포제)(農酺祭), 이사제(里社祭) 등 명칭이 다를 수도 있지만 포제라는 명칭이 가장 보편적이다. 포제에서는 보통 포신(酺神)․토신(土神)이나 지신(地神)․이사신(里社神) 등을 모신다. 포제를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지내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일정 기간 중단되었다가 근래에 되살려 지내는 마을도 있다. 포제의 중단은 대체로 일제강점기나 4․3사건, 미신타파운동이 극심하던 산업화․근대화 시기와 관련이 있다. 제주도에서 행해지는 포제의 준비와 행제법은 사실 대동소이하다. 한편 온평리와 같은 서귀포시 성산읍 관내의 시흥리, 오조리, 수산1리, 수산2리, 성산리, 고성리, 신양리, 난산리, 신산리, 삼달1리, 신풍리, 신천리 등의 마을에서도 포제를 지낸다.
참고문헌백록어문 2 (제주대학교 국어교육연구회, 1987)
남제주군문화유적분포지도 (남제주군․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 2003)
제주도 [마을](/topic/마을)제 종합보고서-제주 유교식 마을제의 전승현장 (제주특별자치도문화진흥본부 박물관운영부, 2010)
지역사례제주도 전역에서 현재까지 포제를 지내는 [마을](/topic/마을)이 여럿 남아 있다. 마을에 따라서는 [농포제](/topic/농포제)(農酺祭), 이사제(里社祭) 등 명칭이 다를 수도 있지만 포제라는 명칭이 가장 보편적이다. 포제에서는 보통 포신(酺神)․토신(土神)이나 지신(地神)․이사신(里社神) 등을 모신다. 포제를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지내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일정 기간 중단되었다가 근래에 되살려 지내는 마을도 있다. 포제의 중단은 대체로 일제강점기나 4․3사건, 미신타파운동이 극심하던 산업화․근대화 시기와 관련이 있다. 제주도에서 행해지는 포제의 준비와 행제법은 사실 대동소이하다. 한편 온평리와 같은 서귀포시 성산읍 관내의 시흥리, 오조리, 수산1리, 수산2리, 성산리, 고성리, 신양리, 난산리, 신산리, 삼달1리, 신풍리, 신천리 등의 마을에서도 포제를 지낸다.
참고문헌백록어문 2 (제주대학교 국어교육연구회, 1987)
남제주군문화유적분포지도 (남제주군․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 2003)
제주도 [마을](/topic/마을)제 종합보고서-제주 유교식 마을제의 전승현장 (제주특별자치도문화진흥본부 박물관운영부, 2010)
문화재관리국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함경남도편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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