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산신당

한국무속신앙사전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 3리에 있으며, 조선시대 국행제(國行祭)이던 죽령산신제의 제당. ‘국[사당](/topic/사당)(國師堂)’이라고도 불리며, 목조[기와](/topic/기와) 형식을 갖추고 있다. 1976년에 ‘충청북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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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 3리에 있으며, 조선시대 국행제(國行祭)이던 죽령산신제의 제당. ‘국[사당](/topic/사당)(國師堂)’이라고도 불리며, 목조[기와](/topic/기와) 형식을 갖추고 있다. 1976년에 ‘충청북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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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선
정의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 3리에 있으며, 조선시대 국행제(國行祭)이던 죽령산신제의 제당. ‘국[사당](/topic/사당)(國師堂)’이라고도 불리며, 목조[기와](/topic/기와) 형식을 갖추고 있다. 1976년에 ‘충청북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었다.
정의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 3리에 있으며, 조선시대 국행제(國行祭)이던 죽령산신제의 제당. ‘국[사당](/topic/사당)(國師堂)’이라고도 불리며, 목조[기와](/topic/기와) 형식을 갖추고 있다. 1976년에 ‘충청북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었다.
참조[다자구할머니](/topic/다자구할머니)죽령산신제[죽령산신제 문서](/topic/죽령산신제문서)
참고문헌죽령국행제조사연구 (이창식?안상경, 박이정, 2003)
참조[다자구할머니](/topic/다자구할머니)죽령산신제[죽령산신제 문서](/topic/죽령산신제문서)
참고문헌죽령국행제조사연구 (이창식?안상경, 박이정, 2003)
내용죽령산신당은 해발 400m의 용부원 3리 앞 당산 정상에 위치하며, 당의 주변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등이 둘러싸고 있다. 죽령산신제의 제사대상은 죽령산신으로, 그 신격(神格)은 [다자구할머니](/topic/다자구할머니)이다. 용부원리 죽령산신당 내부에는 ‘죽령산신지위(竹嶺山神之位)’라 적은 [위패](/topic/위패)를 모셔 두고 있다.

현재 죽령산신당은 전면 세 칸, 측면 한 칸, 뒷면 통칸의 규모이며, 평면은 장방형으로 전퇴집의 형식이다. [기둥](/topic/기둥)은 나무로 만든 원기둥이다. [지붕](/topic/지붕)은 조선시대 권위건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산신당의 내부는 단을 설치하여 죽령산신당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천장](/topic/천장)에는 [서까래](/topic/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처마](/topic/처마)와 기둥 등의 [단청](/topic/단청)은 가칠단청으로, 무늬 없이 단색으로 칠한 단청이다. 주로 수직부재인 기둥이나 동자주 등은 붉은색, 나머지는 옥색으로 칠했다. 당의 앞[마당](/topic/마당)은 자연석을 넓적하게 다듬어 깔아 정비하였다.

무속인들이 출입하여 당 주변에서 기도하는 경우가 있어 당 외부에 울타리를 치고 당의 출입문에도 열쇠를 달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내용죽령산신당은 해발 400m의 용부원 3리 앞 당산 정상에 위치하며, 당의 주변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등이 둘러싸고 있다. 죽령산신제의 제사대상은 죽령산신으로, 그 신격(神格)은 [다자구할머니](/topic/다자구할머니)이다. 용부원리 죽령산신당 내부에는 ‘죽령산신지위(竹嶺山神之位)’라 적은 [위패](/topic/위패)를 모셔 두고 있다.

현재 죽령산신당은 전면 세 칸, 측면 한 칸, 뒷면 통칸의 규모이며, 평면은 장방형으로 전퇴집의 형식이다. [기둥](/topic/기둥)은 나무로 만든 원기둥이다. [지붕](/topic/지붕)은 조선시대 권위건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팔작지붕](/topic/팔작지붕)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산신당의 내부는 단을 설치하여 죽령산신당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천장](/topic/천장)에는 [서까래](/topic/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처마](/topic/처마)와 기둥 등의 [단청](/topic/단청)은 가칠단청으로, 무늬 없이 단색으로 칠한 단청이다. 주로 수직부재인 기둥이나 동자주 등은 붉은색, 나머지는 옥색으로 칠했다. 당의 앞[마당](/topic/마당)은 자연석을 넓적하게 다듬어 깔아 정비하였다.

무속인들이 출입하여 당 주변에서 기도하는 경우가 있어 당 외부에 울타리를 치고 당의 출입문에도 열쇠를 달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역사죽령산신당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世宗) 19년 3월 계묘(癸卯)에 “단양군의 죽령산은 소사이고 묘의 위판은 죽령산지신이라 쓰고 위의 제사지내는 곳은 선덕 7년의 수교에 의해 죽령산 기슭으로 옮길 것(丹陽郡竹嶺山小祀 廟位版 書竹嶺山之神 右祭所 依宣德七年受敎 移竹嶺山麓)”이라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 [사전](/topic/사전)체계의 정비와 더불어 제장(祭場)이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장의 이동은 세종 연간에 추진된 사전(祀典)의 등제 및 신호(神號)의 개혁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국가의 사전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죽령산이 국행의례로서 소사(小祀)로 등재된다. 이에 따라 기존에 산 정상에 있던 제당이 산 중턱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후 죽령산신당의 중수(重修)에 대한 내용은 [죽령산신제 문서](/topic/죽령산신제문서)인 『치성문(致誠文)』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치성문』 가운데 「죽령사 중수재건기(竹嶺祠 重修再建記)」의 해당내용을 보면 “本竹嶺山神堂祠宇 幾函轉覆之境 而是歲春三月 重修再建竣工 檀紀四二八一年戊子三月 都監白”이라 하여 1948년 3월에 중수되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 3리에 위치한 죽령산신당의 [상량문](/topic/상량문)은 “檀紀四二八一年 戊子三月初八日未時 上樑伏願基壽永昌”으로 기록되어 있어, 1948년의 중수내용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역사죽령산신당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世宗) 19년 3월 계묘(癸卯)에 “단양군의 죽령산은 소사이고 묘의 위판은 죽령산지신이라 쓰고 위의 제사지내는 곳은 선덕 7년의 수교에 의해 죽령산 기슭으로 옮길 것(丹陽郡竹嶺山小祀 廟位版 書竹嶺山之神 右祭所 依宣德七年受敎 移竹嶺山麓)”이라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 [사전](/topic/사전)체계의 정비와 더불어 제장(祭場)이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장의 이동은 세종 연간에 추진된 사전(祀典)의 등제 및 신호(神號)의 개혁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국가의 사전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죽령산이 국행의례로서 소사(小祀)로 등재된다. 이에 따라 기존에 산 정상에 있던 제당이 산 중턱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후 죽령산신당의 중수(重修)에 대한 내용은 [죽령산신제 문서](/topic/죽령산신제문서)인 『치성문(致誠文)』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치성문』 가운데 「죽령사 중수재건기(竹嶺祠 重修再建記)」의 해당내용을 보면 “本竹嶺山神堂祠宇 幾函轉覆之境 而是歲春三月 重修再建竣工 檀紀四二八一年戊子三月 都監白”이라 하여 1948년 3월에 중수되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 3리에 위치한 죽령산신당의 [상량문](/topic/상량문)은 “檀紀四二八一年 戊子三月初八日未時 上樑伏願基壽永昌”으로 기록되어 있어, 1948년의 중수내용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민속원한국민속학 새로 읽기최인학 외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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