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지리산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topic/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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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송화섭 |
정의 | 지리산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topic/사당). | 정의 | 지리산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topic/사당). | 역사 | 통일신라가 전국에 삼산오악을 배치하면서 지리산에 성모천왕을 산신으로 배향한다. 『[삼국유사](/topic/삼국유사)』 권5 「감통」7 선도성모수희불사조에 따르면, 통일신라 조정에서 지방통치의 수단으로 삼산오악을 배치하면서 선도산의 성모(聖母)를 지리산 천왕봉에 이식시켜 성모천왕(聖母天王)의 산신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1287년에 올린 『[제왕운기](/topic/제왕운기)(帝王韻紀)』 세기편의 “지리산의 산신은 선도성모”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한편 지리산 천왕봉에 성모천왕을 모신 성모사가 있었다. 이 성모사는 지리산의 남악사와는 다른 것이다. 성모사가 민간인들이 섬기고 관리한 신당(神堂) 형태인데 비하여 남악사는 지방관리들이 지리산신제를 지낸 사묘(祠廟)였다. 남악사의 역사는 『제왕운기』 세기편에 “우리 태조께서 이곳에서 기도하여 지리산의 감몽을 받았기에 남악사(南嶽祠)를 남원소의방(南原所義坊)에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볼 때 고려 초에 지리산에 태조 왕건의 고려왕조 창업을 기념하는 남악사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남원소의방은 고려시대 행정구역명으로, 현재 전남 구례군 광의면과 산동면 일대를 가리킨다.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당동[마을](/topic/마을)에는 남악사지(南嶽祠址)라고 전해 오는 유적지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사묘조에는 지리산신사가 남원부의 남쪽 64리 되는 소아리(小兒里)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리산신사가 남악사로 추정된다. 남악사지 발굴 결과 통일신라 말 고려 초기의 건물지와 조선 초기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나말여초(羅末麗初)에 남악사가 조성되었음을 보여 주는 [기와](/topic/기와)와 전(塼)을 비롯해 남악제사를 봉행하였음을 보여 주는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粉靑沙器)와 조선 후기의 백자류(白磁類) 및 제기(祭器)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고려 초에 왕조 창업 기념으로 남악사를 창건하였으며 조선 후기까지 남악사는 지리산신사로서 중창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천왕봉의 성모사는 통일신라 때 성모천왕을 배향한 [사당](/topic/사당)이고, 남악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초기에 중앙집권의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국가의 [사전](/topic/사전)을 정비하면서 지리산신사로 새롭게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천왕봉의 성모사가 성모천왕의 사당이라면 지리산신사는 지리산 산신에 대한 국행제의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말 전국 명산대천의 산천신을 봉작하는 관행에 따라 1393년(태조 2)에 지리산신에게 호국백(護國伯)의 작위가 내려지기도 했지만 왕조가 바뀌면서 치제하는 형식도 바뀌었다. 1414년(태종 14)에 [예조](/topic/예조)에서 산천을 등제(等第)하면서 전국의 명산대천을 대․중․소사로 편입시키고 지리산신을 중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1416년(태종 16)에 예조는 악(嶽)․해(海)․독(瀆)과 산천(山川)에 제사를 행하는 관원을 정하도록 하면서 고을 수령들에게 때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고 보고하도록 하였다. 1437년(세종 19)에는 산천단묘순번별감(山川壇廟巡審別監)에서 단묘(壇廟)와 신패(神牌)의 제도를 상정하면서 남원부의 지리산은 중사(中祀)로서 사묘의 위판을 ‘지리산지신(智異山之神)’으로 쓰겠다고 하였다. 이때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에 지리산신사가 세워진 것이다. 남악사가 지리산 노고단에서 옮겨 온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으며, 온당리 당동에 고려시대 남악사가 창건되었다가 조선 초에 남악사가 지리산신사로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남악사와 지리산신사는 시대를 달리한 동일한 사묘인 것으로 보인다. 『남원지(南原誌)』에는 1737년(영조 13)에 남원부사의 지원으로 남악사를 중창하였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 책에는 “남악사에는 ‘지리산지신’이라고 쓴 [위패](/topic/위패)가 있으며, 매년 춘․추․정초에 왕명으로 제를 올렸다. 재난이 있을 때마다 별도로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헌관](/topic/헌관)은 당상관, 대축은 수령, 집사는 생원․진사․유생들이 맡았으며, 제물은 관청에서 마련하였다. 예전의 전우(殿宇)는 세 칸이어서 [제관](/topic/제관)들이 불편해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내내 지리산의 남악사에서 춘추(春秋)로 국행제의(國行祭儀)가 거행되었으며, 지리산의 산신이 영험하여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전염병이 크게 돌면 지방관청에서 향과 축을 보내어 여제(厲祭)를 지냈다. 지방 수령들은 국가적인 재앙이 닥치면 지리산 산신에게 제사를 올려 백성들에게 복을 내리고 은택을 베풀기를 기원하였다. | 역사 | 통일신라가 전국에 삼산오악을 배치하면서 지리산에 성모천왕을 산신으로 배향한다. 『[삼국유사](/topic/삼국유사)』 권5 「감통」7 선도성모수희불사조에 따르면, 통일신라 조정에서 지방통치의 수단으로 삼산오악을 배치하면서 선도산의 성모(聖母)를 지리산 천왕봉에 이식시켜 성모천왕(聖母天王)의 산신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1287년에 올린 『[제왕운기](/topic/제왕운기)(帝王韻紀)』 세기편의 “지리산의 산신은 선도성모”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한편 지리산 천왕봉에 성모천왕을 모신 성모사가 있었다. 이 성모사는 지리산의 남악사와는 다른 것이다. 성모사가 민간인들이 섬기고 관리한 신당(神堂) 형태인데 비하여 남악사는 지방관리들이 지리산신제를 지낸 사묘(祠廟)였다. 남악사의 역사는 『제왕운기』 세기편에 “우리 태조께서 이곳에서 기도하여 지리산의 감몽을 받았기에 남악사(南嶽祠)를 남원소의방(南原所義坊)에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볼 때 고려 초에 지리산에 태조 왕건의 고려왕조 창업을 기념하는 남악사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남원소의방은 고려시대 행정구역명으로, 현재 전남 구례군 광의면과 산동면 일대를 가리킨다.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당동[마을](/topic/마을)에는 남악사지(南嶽祠址)라고 전해 오는 유적지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사묘조에는 지리산신사가 남원부의 남쪽 64리 되는 소아리(小兒里)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리산신사가 남악사로 추정된다. 남악사지 발굴 결과 통일신라 말 고려 초기의 건물지와 조선 초기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나말여초(羅末麗初)에 남악사가 조성되었음을 보여 주는 [기와](/topic/기와)와 전(塼)을 비롯해 남악제사를 봉행하였음을 보여 주는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粉靑沙器)와 조선 후기의 백자류(白磁類) 및 제기(祭器)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고려 초에 왕조 창업 기념으로 남악사를 창건하였으며 조선 후기까지 남악사는 지리산신사로서 중창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천왕봉의 성모사는 통일신라 때 성모천왕을 배향한 [사당](/topic/사당)이고, 남악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초기에 중앙집권의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국가의 [사전](/topic/사전)을 정비하면서 지리산신사로 새롭게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천왕봉의 성모사가 성모천왕의 사당이라면 지리산신사는 지리산 산신에 대한 국행제의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말 전국 명산대천의 산천신을 봉작하는 관행에 따라 1393년(태조 2)에 지리산신에게 호국백(護國伯)의 작위가 내려지기도 했지만 왕조가 바뀌면서 치제하는 형식도 바뀌었다. 1414년(태종 14)에 [예조](/topic/예조)에서 산천을 등제(等第)하면서 전국의 명산대천을 대․중․소사로 편입시키고 지리산신을 중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1416년(태종 16)에 예조는 악(嶽)․해(海)․독(瀆)과 산천(山川)에 제사를 행하는 관원을 정하도록 하면서 고을 수령들에게 때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고 보고하도록 하였다. 1437년(세종 19)에는 산천단묘순번별감(山川壇廟巡審別監)에서 단묘(壇廟)와 신패(神牌)의 제도를 상정하면서 남원부의 지리산은 중사(中祀)로서 사묘의 위판을 ‘지리산지신(智異山之神)’으로 쓰겠다고 하였다. 이때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에 지리산신사가 세워진 것이다. 남악사가 지리산 노고단에서 옮겨 온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으며, 온당리 당동에 고려시대 남악사가 창건되었다가 조선 초에 남악사가 지리산신사로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남악사와 지리산신사는 시대를 달리한 동일한 사묘인 것으로 보인다. 『남원지(南原誌)』에는 1737년(영조 13)에 남원부사의 지원으로 남악사를 중창하였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 책에는 “남악사에는 ‘지리산지신’이라고 쓴 [위패](/topic/위패)가 있으며, 매년 춘․추․정초에 왕명으로 제를 올렸다. 재난이 있을 때마다 별도로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헌관](/topic/헌관)은 당상관, 대축은 수령, 집사는 생원․진사․유생들이 맡았으며, 제물은 관청에서 마련하였다. 예전의 전우(殿宇)는 세 칸이어서 [제관](/topic/제관)들이 불편해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내내 지리산의 남악사에서 춘추(春秋)로 국행제의(國行祭儀)가 거행되었으며, 지리산의 산신이 영험하여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내리게 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전염병이 크게 돌면 지방관청에서 향과 축을 보내어 여제(厲祭)를 지냈다. 지방 수령들은 국가적인 재앙이 닥치면 지리산 산신에게 제사를 올려 백성들에게 복을 내리고 은택을 베풀기를 기원하였다. | 형태 | 지리산의 대표적인 사묘는 남악사이다. 사묘는 모두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반의 전통적인 사묘 건축물이다. 지리산 노고단(1,507m)의 지맥인 간미봉(艮美峰)에서 서남쪽 지맥 말단부에 위치하는 남악사에는 위판 하나가 [봉안](/topic/봉안)되어 있었다. 남악사는 1737년에 중창하면서 사묘가 좁아 불편하다는 요청으로 전우(殿宇), 신문(神門), 성생청(省牲廳), 객사(客舍), 유생청(儒生廳), 지응청(支應廳), 마구(馬廐), [대문](/topic/대문) 등이 건립되었다. | 형태 | 지리산의 대표적인 사묘는 남악사이다. 사묘는 모두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반의 전통적인 사묘 건축물이다. 지리산 노고단(1,507m)의 지맥인 간미봉(艮美峰)에서 서남쪽 지맥 말단부에 위치하는 남악사에는 위판 하나가 [봉안](/topic/봉안)되어 있었다. 남악사는 1737년에 중창하면서 사묘가 좁아 불편하다는 요청으로 전우(殿宇), 신문(神門), 성생청(省牲廳), 객사(客舍), 유생청(儒生廳), 지응청(支應廳), 마구(馬廐), [대문](/topic/대문) 등이 건립되었다. | 의의 | 지리산 천왕봉의 성모사는 성모천왕을 배향한 신당의 성격이 강하지만, 남원부 소의방 소아리에 위치한 남악사는 지리산산신을 배향한 국가적 사묘였다. 성모사는 민간인과 무격들이 제사의 주체인 반면에 남악사는 국가의 산천 제사 가운데 중사의 사묘로서 왕을 대신하여 지방 관찰사가 제사를 주관하는 국행제의였다. 지금은 이러한 전통제의가 상실되었지만 남악사의 제사는 구례군의 ‘[지리산남악제](/topic/지리산남악제)’, 함양군의 ‘지리산천왕축제’에서 역사적 전통을 잇고 있다. | 참고문헌 | 남악사지지표조사보고서 (목[포대](/topic/포대)학교 박물관,전라남도 구례군, 1992) 남악사 (구례문화원, 2000)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최석기 외 옮김, 돌[베개](/topic/베개),, 2001) 조선시대 [사전](/topic/사전)제도와 금성산신 (송화섭, 한국문화와 역사민속, 신아출판사, 2003) 지리산의 노고단과 성모천왕 (송화섭, 도교문화연구 27, 한국도교문화학회, 2007) 조선시대 산신숭배와 지리산의 신사 (김아네스, 지리산 그곳에 길이 있다, 2010 인문한국(HK)사업 지리산권문화연구단) | 의의 | 지리산 천왕봉의 성모사는 성모천왕을 배향한 신당의 성격이 강하지만, 남원부 소의방 소아리에 위치한 남악사는 지리산산신을 배향한 국가적 사묘였다. 성모사는 민간인과 무격들이 제사의 주체인 반면에 남악사는 국가의 산천 제사 가운데 중사의 사묘로서 왕을 대신하여 지방 관찰사가 제사를 주관하는 국행제의였다. 지금은 이러한 전통제의가 상실되었지만 남악사의 제사는 구례군의 ‘[지리산남악제](/topic/지리산남악제)’, 함양군의 ‘지리산천왕축제’에서 역사적 전통을 잇고 있다. | 참고문헌 | 남악사지지표조사보고서 (목[포대](/topic/포대)학교 박물관,전라남도 구례군, 1992) 남악사 (구례문화원, 2000)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최석기 외 옮김, 돌[베개](/topic/베개),, 2001) 조선시대 [사전](/topic/사전)제도와 금성산신 (송화섭, 한국문화와 역사민속, 신아출판사, 2003) 지리산의 노고단과 성모천왕 (송화섭, 도교문화연구 27, 한국도교문화학회, 2007) 조선시대 산신숭배와 지리산의 신사 (김아네스, 지리산 그곳에 길이 있다, 2010 인문한국(HK)사업 지리산권문화연구단) | 유래 | 남악사는 통일신라가 삼산오악(三山五嶽)의 산악숭배 사상을 중국에서 도입하면서 유래되었다. 신라에서는 삼국통일 직후에 지방 통치 편제로 9주 5소경과 삼산오악을 배치하면서 남원에 남원경을 두고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고대부터 지리산은 왕실 및 국가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의 고려왕조 창업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사전](/topic/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지리산신사에서 지방수령이 제사를 봉행하는 장소였다. | 유래 | 남악사는 통일신라가 삼산오악(三山五嶽)의 산악숭배 사상을 중국에서 도입하면서 유래되었다. 신라에서는 삼국통일 직후에 지방 통치 편제로 9주 5소경과 삼산오악을 배치하면서 남원에 남원경을 두고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고대부터 지리산은 왕실 및 국가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의 고려왕조 창업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사전](/topic/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지리산신사에서 지방수령이 제사를 봉행하는 장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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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리국 |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서울편 | 1979 | 정음사 | 한국의 무 | 조흥윤 | 1983 | 국립민속박물관 | 한국의 무속-서울, 황해도편 | 1999 | 비교민속학회 | 서울굿의 동쪽제와 서쪽제 비교 | 고영희 | 2005 | 민속원 | 서울굿의 양상과 의미 | 홍태한 | 2006 | 민속원 | 서울굿의 이해 | 한국무속학회 | 2007 | 창비 | 조선무속고-역사로 본 한국 무속 | 이능화 지음, 서영대 역주 |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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