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의 계족산 정상에서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의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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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황경순 |
정의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의 계족산 정상에서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의례. | 정의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의 계족산 정상에서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의례. | 내용 | 하지가 지나고 초복이 되도록 비가 오지 않으면 좋은 날을 택일하여 계족산 날망(정상)에 올라가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냈다. 제물로는 돼지머리와 [삼실과](/topic/삼실과)를 준비한다. 정상에 도착하면 간단히 유교식 제사를 올리고, 서너 개씩 준비해 간 [장작](/topic/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을 놓으며 기우제를 지냈는데, 흔히 군 단위로주최하여 수십 개의 [마을](/topic/마을)이 밤중에 불을 놓기 때문에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양기(陽氣)인 불로 음기인 비구름을 부른다는 의미가 있다. 또 [삿갓](/topic/삿갓)을 쓰고 짚으로 만든 도랭이([도롱이](/topic/도롱이))를 입고 물병의 물을 뿌려서 삿갓과 도롱이를 적시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옷을 적시며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유사한 현상은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는 [유감주술](/topic/유감주술)에 따른 방법이다. 기우제 참여 인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성과 노인을 제외한 계족산 일대 마을 남자들이 주재하였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계족산의 기운이 영험하고 봉우리에 [명당](/topic/명당)이 많아서 사람들이 몰래 평장(또는 암장, 봉분을 만들지 않고 시신을 안장하는 것)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마다 어김없이 마을에 가뭄이 들어 이를 의심한 주민들은 무덤을 찾아내어 파내고 기우제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계족산기우제는 비가 내려 농사가 잘 되도록 하기 위한 염원에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중단된 계족산기우제는 2007년 대덕문화원의 주관 아래 ‘계족산 무제’라는 이름으로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출전하여 동상을 받은 이후로 매년 단옷날을 즈음하여 우제를 재현하고 있다. | 내용 | 하지가 지나고 초복이 되도록 비가 오지 않으면 좋은 날을 택일하여 계족산 날망(정상)에 올라가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냈다. 제물로는 돼지머리와 [삼실과](/topic/삼실과)를 준비한다. 정상에 도착하면 간단히 유교식 제사를 올리고, 서너 개씩 준비해 간 [장작](/topic/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을 놓으며 기우제를 지냈는데, 흔히 군 단위로주최하여 수십 개의 [마을](/topic/마을)이 밤중에 불을 놓기 때문에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양기(陽氣)인 불로 음기인 비구름을 부른다는 의미가 있다. 또 [삿갓](/topic/삿갓)을 쓰고 짚으로 만든 도랭이([도롱이](/topic/도롱이))를 입고 물병의 물을 뿌려서 삿갓과 도롱이를 적시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옷을 적시며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유사한 현상은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는 [유감주술](/topic/유감주술)에 따른 방법이다. 기우제 참여 인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성과 노인을 제외한 계족산 일대 마을 남자들이 주재하였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계족산의 기운이 영험하고 봉우리에 [명당](/topic/명당)이 많아서 사람들이 몰래 평장(또는 암장, 봉분을 만들지 않고 시신을 안장하는 것)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마다 어김없이 마을에 가뭄이 들어 이를 의심한 주민들은 무덤을 찾아내어 파내고 기우제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계족산기우제는 비가 내려 농사가 잘 되도록 하기 위한 염원에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중단된 계족산기우제는 2007년 대덕문화원의 주관 아래 ‘계족산 무제’라는 이름으로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출전하여 동상을 받은 이후로 매년 단옷날을 즈음하여 우제를 재현하고 있다. | 역사 | 계족산은 조선시대 회덕현(懷德縣)의 [진산](/topic/진산)(鎭山)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세속에 이르기를 계족산이 울면 비가 온다”라고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기우제의 역사는 고려시대 무렵으로 추정된다. 구술에 따르면 기우제를 지낸 곳은 계족산성(사적 제355호)이 위치한 인근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기우제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장동의 진골과 새뜸, 읍내동의 뒷골 등 여러 자연[마을](/topic/마을)에서는 산신제와 탑제가 현재까지 전승하고 있는데 비하여 계족산의 기우제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계족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형태가 닭의 발과 같이 등성이가 연이어져 있고 사이마다 골이 깊은 데에서 연유하였으며, ‘닭다리산’이라고도 일컫는다. 한편 가뭄이 심하게들면 산이 울고, 산이 울면 비가 온다고 하여 계족산을 ‘비수리’라고도 한다. 계족산의 서남쪽에는 장동, 동남쪽에는 연축동, 동쪽에는 읍내동이 각각 펼쳐져 있다. 이 지역사람들은 ‘기우제’라는 용어보다 ‘우제(雨祭)’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회덕현의 중심 마을인 현재의 장동에서는 ‘우제’라는 용어가 우세하다. 계족산기우제단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백제산성인 계족산성을 통해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계족산(둘레 약 1,200m, 높이 399m)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계족산성성내에서는 백제시대는 물론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토기와 자기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산성으로 알려져 있는 이곳은 조선 말기에 동학[농민](/topic/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산성의 특정 부분에 ‘우술성(雨述城)’이라 불리는 유적이 있어 기우제와의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 | 역사 | 계족산은 조선시대 회덕현(懷德縣)의 [진산](/topic/진산)(鎭山)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세속에 이르기를 계족산이 울면 비가 온다”라고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기우제의 역사는 고려시대 무렵으로 추정된다. 구술에 따르면 기우제를 지낸 곳은 계족산성(사적 제355호)이 위치한 인근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기우제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장동의 진골과 새뜸, 읍내동의 뒷골 등 여러 자연[마을](/topic/마을)에서는 산신제와 탑제가 현재까지 전승하고 있는데 비하여 계족산의 기우제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계족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형태가 닭의 발과 같이 등성이가 연이어져 있고 사이마다 골이 깊은 데에서 연유하였으며, ‘닭다리산’이라고도 일컫는다. 한편 가뭄이 심하게들면 산이 울고, 산이 울면 비가 온다고 하여 계족산을 ‘비수리’라고도 한다. 계족산의 서남쪽에는 장동, 동남쪽에는 연축동, 동쪽에는 읍내동이 각각 펼쳐져 있다. 이 지역사람들은 ‘기우제’라는 용어보다 ‘우제(雨祭)’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회덕현의 중심 마을인 현재의 장동에서는 ‘우제’라는 용어가 우세하다. 계족산기우제단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백제산성인 계족산성을 통해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계족산(둘레 약 1,200m, 높이 399m)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계족산성성내에서는 백제시대는 물론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토기와 자기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산성으로 알려져 있는 이곳은 조선 말기에 동학[농민](/topic/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산성의 특정 부분에 ‘우술성(雨述城)’이라 불리는 유적이 있어 기우제와의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 | 지역사례 | [농민](/topic/농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 농사이고, 농사를 좌우하는 것이 비였기 때문에 기우제는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 왔다. 수리시설이 부족하던 시기에 기우제는 전국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의례였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리의 수암산에서는 유교식 기우제를 지낸 다음 남쪽 잔디밭에 불을 질렀다. 이는 그곳이용두(龍頭) 형상이어서 뜨거워지면 이를 식히려고 비를 내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와 신대리는 두 [마을](/topic/마을)의 남쪽에 있는 야산에서 유교식 기우제를 지냈다. 제일(祭日) 저녁이면 마을 부인들은 머리를 감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서 물병을 들고 냇가로 가 물병에 정성껏 물을 담은 뒤 기우제장으로 향한다. 제의에 [참례](/topic/참례)한 부인들은 의식이 끝나면 솔잎으로 물병을 막은 뒤 각자 집으로 가져가 [사립문](/topic/사립문) [기둥](/topic/기둥)에 거꾸로 매단다. 그리고 제일을 정하고부터는 제장을 원래의 제장 터로부터 500여 m 떨어진 냇가로 옮겼다가 비가 오면 본래의 위치로 옮긴다. 지금은 임하댐 건설로 수몰된 경북 안동시 임동면 지례리에서는 도연폭포에서 개를 잡아 그 피를 바위에 바르고, 개는 폭포 속에 넣었다. 그리고 폭포 위에서는 물이 내려[가지](/topic/가지) 못하도록 소나무와 자갈로 보를 쌓아 물을 막았다. 이처럼 기우제는 신에게 호소하거나 화해하거나 대항하여 비를 얻기도 하고, 유사법칙과 [음양오행](/topic/음양오행)을 통하여 비를 유도하는 등 방법이 복합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기우제가 생존과 직결된 절박한 상황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온갖 수단과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 世宗實錄地理志 (한국민속제의와 [음양오행](/topic/음양오행), 김의숙, 집문당, 1993) | 지역사례 | [농민](/topic/농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 농사이고, 농사를 좌우하는 것이 비였기 때문에 기우제는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 왔다. 수리시설이 부족하던 시기에 기우제는 전국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의례였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리의 수암산에서는 유교식 기우제를 지낸 다음 남쪽 잔디밭에 불을 질렀다. 이는 그곳이용두(龍頭) 형상이어서 뜨거워지면 이를 식히려고 비를 내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와 신대리는 두 [마을](/topic/마을)의 남쪽에 있는 야산에서 유교식 기우제를 지냈다. 제일(祭日) 저녁이면 마을 부인들은 머리를 감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서 물병을 들고 냇가로 가 물병에 정성껏 물을 담은 뒤 기우제장으로 향한다. 제의에 [참례](/topic/참례)한 부인들은 의식이 끝나면 솔잎으로 물병을 막은 뒤 각자 집으로 가져가 [사립문](/topic/사립문) [기둥](/topic/기둥)에 거꾸로 매단다. 그리고 제일을 정하고부터는 제장을 원래의 제장 터로부터 500여 m 떨어진 냇가로 옮겼다가 비가 오면 본래의 위치로 옮긴다. 지금은 임하댐 건설로 수몰된 경북 안동시 임동면 지례리에서는 도연폭포에서 개를 잡아 그 피를 바위에 바르고, 개는 폭포 속에 넣었다. 그리고 폭포 위에서는 물이 내려[가지](/topic/가지) 못하도록 소나무와 자갈로 보를 쌓아 물을 막았다. 이처럼 기우제는 신에게 호소하거나 화해하거나 대항하여 비를 얻기도 하고, 유사법칙과 [음양오행](/topic/음양오행)을 통하여 비를 유도하는 등 방법이 복합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기우제가 생존과 직결된 절박한 상황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온갖 수단과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 世宗實錄地理志 (한국민속제의와 [음양오행](/topic/음양오행), 김의숙, 집문당,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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