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대전광역시 중구 유천동 주민들이 보문산 산신에게 [마을](/topic/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 1997년 1월 9일에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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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이명진 |
정의 | 대전광역시 중구 유천동 주민들이 보문산 산신에게 [마을](/topic/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 1997년 1월 9일에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 정의 | 대전광역시 중구 유천동 주민들이 보문산 산신에게 [마을](/topic/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 1997년 1월 9일에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유천동산신제는 매년 동짓달 초사흗날에 행해진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에는 초나흗날 자시(초사흗날 자정)에 제를 지냈다. 동네에 초상이나 출산 등 부정이 들면 다른 날을 택해 제를 지냈다. 부정이 들 때 제를 지내게 되면 동네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고 여긴 까닭이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부터는 공개행사로 초사흗날 오후 6시경에 지낸다. 제의 열흘 전에 총회를 열어 [제관](/topic/제관)을 정하고, 산신제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의논한다. 제의 일주일 전부터는 산신당을 청소하고, [금줄](/topic/금줄)과 [황토](/topic/황토)를 쳐서 부정으로부터 보호한다. 금줄은 왼새끼로 꼬고 사이사이에 흰 종이를 끼워 산제당 주변에 둘러친다. 특히 제당의 출입구에는 사람의 머리가 닿을 정도로 낮게 둘러서 사람들이 주의하도록 한다. 황토는 산제당의 출입문과 제당 입구에 세 무더기씩 놓는데, 주로 보문산에서 파 온다. 제관은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을 봐서 좋은 사람으로 선정하며, 제관은 유사([헌관](/topic/헌관)), 우집사, 좌집사, 축관 각 한 명 등 모두 네 명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집사는 한 명이 늘어 두 명이 되었다. 이들은 유향계에 속한 인물 가운데 선출하였으며, 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선출된 경우가 많았다. 유사로 정해지면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힘든 일을 맡아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 보존회원 가운데 집에 큰 불상사가 없고 덕망과 인덕을 갖춘 사람 가운데 적임자를 선출하였으나 2010년부터는 다시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을 제관으로 임명한다. 제관으로 선출되면 날마다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것을 보지 않도록 조심한다. 특히 유사는 부부간의 잠자리, 비린 음식, 상가(喪家) 등을 피해야 한다. 생물을 죽이는 것이나 피를 보는 것도 피해야 한다. 제물은 유사 부부가 준비하여 유사의 집에 보관하였으나 문화재 지정 이후에는 산신제를 공개행사로 치르면서 산신당 가까운 집에 제물을 마련하는 사람을 따로 정하고 있다. 장은 제관들이 본다. 이때에도 반드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부정한 것을 보지 않도록 조심한다. 제물을 구입할 때에는 절대 흥정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장을 볼 때 제기도 구입하였다. 제기는 목기를 사용하며, 매년 구입하였다. 사용한 제기는 제물 장만 등으로 고생한 유사가 가져간다. 그러다가 점차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좋아지면서 제기를 가져[가지](/topic/가지) 않게 되어 한 가지 목기를 장기간 사용했다. 1998년경부터는 사기로 된 제기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의 제기는 산신당에 보관하고 있다. 산제에 올리는 제물은 돼지, 떡, 삼탕, [삼채](/topic/삼채), [삼실과](/topic/삼실과), 포, 제주, [사과](/topic/사과), 배 등이다. 돼지는 한 마리를 통으로 잡아서 올린다. 이때 돼지의 머리가 동쪽을 향하도록 놓는다. 1980년 이후에는 제의가 간소화되고 제의 비용도 비싸져 돼지 머리만 올리기도 했으나 문화재 지정 이후부터 다시 통돼지를 올리고 있다. 과거에는 돼지를 산신당 옆에 있던 옹달샘에서 잡았다. 지금은 이 옹달샘이 없어지고 새롭게 복원한 모습만 남아 있다. 떡은 시루째 올리는데 석 되 서 홉을 찐다. 시루 양쪽에는 북어포를 꽂고, 떡시루에는 쌀종지와 세발심지를 함께 올린다. 삼탕으로는 육탕(쇠고기), 어탕(명태), 소탕(두부)을 올린다. 삼채는 무스나물(무나물), 고사리나물, [시금치](/topic/시금치)나물(또는 [숙주나물](/topic/숙주나물))이다. 삼실과는 [대추](/topic/대추), 밤, 곶감이다. 제주는 원래 유사의 집에서 담아 썼으나 지금은 시중에서 판매하는 술 가운데 곡식으로 만든 것이라 하여 청주를 사용한다. 제비는 제의를 지내기 20일 전에 [마을](/topic/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걷었고, 사람들은 쌀이나 돈 등을 정성껏 냈다. 마을이 점차 도시화되어 장사나 사업하는 사람이 늘게 되면서 집집보다는 상가를 돌며 후원을 받았고,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는 시와 구에서 지원되는 일정의 금액과 보존회원들의 향촉대(香燭代, 향과 초를 살 수 있는 정도의 약소한 성의) 등으로 운영하고 있다. 2010년 4월에는 임시총회를 통해 보존회원의 연회비 납부 규정화를 추진하였다. 제례 당일이 되면 가장 먼저 풍물을 치며 마을을 돈다. 현재는 유천1동, 2동의 풍물패가 각각 자신의 구역을 돌며 산신제의 시작을 알린다. 산신제는 ‘[분향](/topic/분향)-강신-[참신](/topic/참신)-[헌작](/topic/헌작)-[독축](/topic/독축)-소지-[분축](/topic/분축)-[음복](/topic/음복)’의 순서로 진행된다. 헌작은 한 번만 행한다. 이때 우집사가 술잔에 술을 따르고 좌집사가 전작(尊爵, 술을 받아 신위 앞에 올리는 일)한다. 현재 [축문](/topic/축문)의 내용은 유천동 주민의 건강과 화재 방지, 교통사고 예방 등을 기원하는 것이다. 1978년, 1987년, 2009년에 각각 사용한 축문을 비교하면 유향계에서 보존회로 변화되었음을 실증할 수 있으며, 당시 사회의 환란과 축원 사항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한문 維歲次 戊午十一月丙申朔初三日 柳鄕稧選定代表 幼學權永雲 敢昭告于 寶文山神靈 伏惟 天有靈 人爲貴 天以日月爲耳目地以山川爲血脈 人以天地爲父母 惟我 寶文山神靈鎭坐畿湖之中央 俯瞰八方之物色 生育地方之人物幾千萬年矣 神靈 上通天 下達地 中察人 伏願 神靈陳此庶裔 一免水火之災 三免交通輪禍之亂 咸賴天地父母之恩 一域安過太平 千萬幸甚 謹準年例選定祭員 齋戒三日沐浴更衣 略設犧牲 恭伸奠獻 尙饗 국한문혼용 維歲次 西紀一九八七年 丁卯歲十一月 丙午 初三日幼學○○○은 柳鄕員과 柳川洞民을 代表하여 敢히寶文山神靈任께 仰告하옵나이다. 幼學 등 愚味한 本洞民들은 神靈任의 恩德으로 天地爲父母하고 日月星辰照鑑下에 길이 保全하고 있사옵니다. 寶文山神靈任께서는 이곳 中都大田에 鎭坐하시와 億兆蒼生을 굽어 살피시고 愛護撫育하여 주심에는 衷心으로 感銘不已이옵나이다. 神靈任께서는 上通天하시고 下達地하시며 全知全能하신 줄 믿사옵니다. 伏願컨대 우리 柳鄕員 및 洞民들과 畜生에 이르기까지 雨順風調로 各其生業에 따라 所願成就하고 富裕한 生計를 이룩하여 有能한 英材를 많이 배출케 하여 주시옵고, 一免 疫疾의 殃禍와 水火의 災殃과 兵役中의 災 三免交通輪禍之亂 咸賴天, 橫厄 交通事故 諸般의 患亂病苦를 防禦하여 주시옵고, 우리 柳川洞民 各 家庭에 幸運이 깃들게 도와주시옵기 祈하나이다. 悚懼하옵게도 今年은 幼學이 祭典에 選定되와 沐浴齋戒하옵고 略設淸酌하와 삼가 奉行하오니 歆饗하옵소서. 한문 維歲次 己丑十一月乙未朔初三日 丁酉 保存會選定 幼學 金弘太 敢昭告于 寶文山神靈 伏惟 天有靈耳目 地以山川爲血脈 人以天地爲父母 惟我 寶文山神靈 鎭坐畿湖之中央 俯瞰八方之物色 生育地方之人物 上通天 下達地 中察人伏願 神靈 陳此庶裔 一免病疫之禍 二免水火之災三免交通輪禍之亂 咸賴天地父母之恩 一域安過太平 千萬幸甚 謹以年例選定 犧牲 恭伸奠獻 尙饗 축관이 축문을 읽고 나면 불태운다. 소지는 제관이 직접 마을 사람들의 것을 올려준다. 이때 산신제의 향촉대를 낸 사람들을 중심으로 올린다. 소지까지 올리고 나면 산신당에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제의는 끝난다. 제의가 끝나면 징을 세 번 쳐서 제의가 끝났음을 알린다. 이때 징은 제의의 끝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호랑이가 쇳소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산신을 모시고 내려온 호랑이를 산으로 보내는 의식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징이 울린 뒤에야 마을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 만큼 산신제의 엄숙함과 경외감이 대단했다. 제의가 끝나면 사람들이 모두 나와 음복을 한다. 산신제를 지낸 음식을 먹으면 복이 있다고 여겨서 이웃과 경로당에 전달하면서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 | 내용 | 유천동산신제는 매년 동짓달 초사흗날에 행해진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에는 초나흗날 자시(초사흗날 자정)에 제를 지냈다. 동네에 초상이나 출산 등 부정이 들면 다른 날을 택해 제를 지냈다. 부정이 들 때 제를 지내게 되면 동네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고 여긴 까닭이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부터는 공개행사로 초사흗날 오후 6시경에 지낸다. 제의 열흘 전에 총회를 열어 [제관](/topic/제관)을 정하고, 산신제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의논한다. 제의 일주일 전부터는 산신당을 청소하고, [금줄](/topic/금줄)과 [황토](/topic/황토)를 쳐서 부정으로부터 보호한다. 금줄은 왼새끼로 꼬고 사이사이에 흰 종이를 끼워 산제당 주변에 둘러친다. 특히 제당의 출입구에는 사람의 머리가 닿을 정도로 낮게 둘러서 사람들이 주의하도록 한다. 황토는 산제당의 출입문과 제당 입구에 세 무더기씩 놓는데, 주로 보문산에서 파 온다. 제관은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을 봐서 좋은 사람으로 선정하며, 제관은 유사([헌관](/topic/헌관)), 우집사, 좌집사, 축관 각 한 명 등 모두 네 명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집사는 한 명이 늘어 두 명이 되었다. 이들은 유향계에 속한 인물 가운데 선출하였으며, 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선출된 경우가 많았다. 유사로 정해지면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힘든 일을 맡아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 보존회원 가운데 집에 큰 불상사가 없고 덕망과 인덕을 갖춘 사람 가운데 적임자를 선출하였으나 2010년부터는 다시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을 제관으로 임명한다. 제관으로 선출되면 날마다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것을 보지 않도록 조심한다. 특히 유사는 부부간의 잠자리, 비린 음식, 상가(喪家) 등을 피해야 한다. 생물을 죽이는 것이나 피를 보는 것도 피해야 한다. 제물은 유사 부부가 준비하여 유사의 집에 보관하였으나 문화재 지정 이후에는 산신제를 공개행사로 치르면서 산신당 가까운 집에 제물을 마련하는 사람을 따로 정하고 있다. 장은 제관들이 본다. 이때에도 반드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부정한 것을 보지 않도록 조심한다. 제물을 구입할 때에는 절대 흥정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장을 볼 때 제기도 구입하였다. 제기는 목기를 사용하며, 매년 구입하였다. 사용한 제기는 제물 장만 등으로 고생한 유사가 가져간다. 그러다가 점차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좋아지면서 제기를 가져[가지](/topic/가지) 않게 되어 한 가지 목기를 장기간 사용했다. 1998년경부터는 사기로 된 제기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의 제기는 산신당에 보관하고 있다. 산제에 올리는 제물은 돼지, 떡, 삼탕, [삼채](/topic/삼채), [삼실과](/topic/삼실과), 포, 제주, [사과](/topic/사과), 배 등이다. 돼지는 한 마리를 통으로 잡아서 올린다. 이때 돼지의 머리가 동쪽을 향하도록 놓는다. 1980년 이후에는 제의가 간소화되고 제의 비용도 비싸져 돼지 머리만 올리기도 했으나 문화재 지정 이후부터 다시 통돼지를 올리고 있다. 과거에는 돼지를 산신당 옆에 있던 옹달샘에서 잡았다. 지금은 이 옹달샘이 없어지고 새롭게 복원한 모습만 남아 있다. 떡은 시루째 올리는데 석 되 서 홉을 찐다. 시루 양쪽에는 북어포를 꽂고, 떡시루에는 쌀종지와 세발심지를 함께 올린다. 삼탕으로는 육탕(쇠고기), 어탕(명태), 소탕(두부)을 올린다. 삼채는 무스나물(무나물), 고사리나물, [시금치](/topic/시금치)나물(또는 [숙주나물](/topic/숙주나물))이다. 삼실과는 [대추](/topic/대추), 밤, 곶감이다. 제주는 원래 유사의 집에서 담아 썼으나 지금은 시중에서 판매하는 술 가운데 곡식으로 만든 것이라 하여 청주를 사용한다. 제비는 제의를 지내기 20일 전에 [마을](/topic/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걷었고, 사람들은 쌀이나 돈 등을 정성껏 냈다. 마을이 점차 도시화되어 장사나 사업하는 사람이 늘게 되면서 집집보다는 상가를 돌며 후원을 받았고,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는 시와 구에서 지원되는 일정의 금액과 보존회원들의 향촉대(香燭代, 향과 초를 살 수 있는 정도의 약소한 성의) 등으로 운영하고 있다. 2010년 4월에는 임시총회를 통해 보존회원의 연회비 납부 규정화를 추진하였다. 제례 당일이 되면 가장 먼저 풍물을 치며 마을을 돈다. 현재는 유천1동, 2동의 풍물패가 각각 자신의 구역을 돌며 산신제의 시작을 알린다. 산신제는 ‘[분향](/topic/분향)-강신-[참신](/topic/참신)-[헌작](/topic/헌작)-[독축](/topic/독축)-소지-[분축](/topic/분축)-[음복](/topic/음복)’의 순서로 진행된다. 헌작은 한 번만 행한다. 이때 우집사가 술잔에 술을 따르고 좌집사가 전작(尊爵, 술을 받아 신위 앞에 올리는 일)한다. 현재 [축문](/topic/축문)의 내용은 유천동 주민의 건강과 화재 방지, 교통사고 예방 등을 기원하는 것이다. 1978년, 1987년, 2009년에 각각 사용한 축문을 비교하면 유향계에서 보존회로 변화되었음을 실증할 수 있으며, 당시 사회의 환란과 축원 사항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한문 維歲次 戊午十一月丙申朔初三日 柳鄕稧選定代表 幼學權永雲 敢昭告于 寶文山神靈 伏惟 天有靈 人爲貴 天以日月爲耳目地以山川爲血脈 人以天地爲父母 惟我 寶文山神靈鎭坐畿湖之中央 俯瞰八方之物色 生育地方之人物幾千萬年矣 神靈 上通天 下達地 中察人 伏願 神靈陳此庶裔 一免水火之災 三免交通輪禍之亂 咸賴天地父母之恩 一域安過太平 千萬幸甚 謹準年例選定祭員 齋戒三日沐浴更衣 略設犧牲 恭伸奠獻 尙饗 국한문혼용 維歲次 西紀一九八七年 丁卯歲十一月 丙午 初三日幼學○○○은 柳鄕員과 柳川洞民을 代表하여 敢히寶文山神靈任께 仰告하옵나이다. 幼學 등 愚味한 本洞民들은 神靈任의 恩德으로 天地爲父母하고 日月星辰照鑑下에 길이 保全하고 있사옵니다. 寶文山神靈任께서는 이곳 中都大田에 鎭坐하시와 億兆蒼生을 굽어 살피시고 愛護撫育하여 주심에는 衷心으로 感銘不已이옵나이다. 神靈任께서는 上通天하시고 下達地하시며 全知全能하신 줄 믿사옵니다. 伏願컨대 우리 柳鄕員 및 洞民들과 畜生에 이르기까지 雨順風調로 各其生業에 따라 所願成就하고 富裕한 生計를 이룩하여 有能한 英材를 많이 배출케 하여 주시옵고, 一免 疫疾의 殃禍와 水火의 災殃과 兵役中의 災 三免交通輪禍之亂 咸賴天, 橫厄 交通事故 諸般의 患亂病苦를 防禦하여 주시옵고, 우리 柳川洞民 各 家庭에 幸運이 깃들게 도와주시옵기 祈하나이다. 悚懼하옵게도 今年은 幼學이 祭典에 選定되와 沐浴齋戒하옵고 略設淸酌하와 삼가 奉行하오니 歆饗하옵소서. 한문 維歲次 己丑十一月乙未朔初三日 丁酉 保存會選定 幼學 金弘太 敢昭告于 寶文山神靈 伏惟 天有靈耳目 地以山川爲血脈 人以天地爲父母 惟我 寶文山神靈 鎭坐畿湖之中央 俯瞰八方之物色 生育地方之人物 上通天 下達地 中察人伏願 神靈 陳此庶裔 一免病疫之禍 二免水火之災三免交通輪禍之亂 咸賴天地父母之恩 一域安過太平 千萬幸甚 謹以年例選定 犧牲 恭伸奠獻 尙饗 축관이 축문을 읽고 나면 불태운다. 소지는 제관이 직접 마을 사람들의 것을 올려준다. 이때 산신제의 향촉대를 낸 사람들을 중심으로 올린다. 소지까지 올리고 나면 산신당에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제의는 끝난다. 제의가 끝나면 징을 세 번 쳐서 제의가 끝났음을 알린다. 이때 징은 제의의 끝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호랑이가 쇳소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산신을 모시고 내려온 호랑이를 산으로 보내는 의식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징이 울린 뒤에야 마을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 만큼 산신제의 엄숙함과 경외감이 대단했다. 제의가 끝나면 사람들이 모두 나와 음복을 한다. 산신제를 지낸 음식을 먹으면 복이 있다고 여겨서 이웃과 경로당에 전달하면서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 | 역사 | 유천동에서 언제부터 산신제를 지냈는지 알 수 없지만 [마을](/topic/마을) 거주자들은 1500년대 중기부터 지내온 것으로 여기고 있다. 유천동산신당 역시 언제 지어졌는지 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어져 오는 구술에 따르면 과거에도 지금의 위치 그대로였다. 유천동산신당은 특이하게 들 한가운데에 있다. 산신당은 보통 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마련이지만 보문산 산신을 모시는 유천동은 실재 보문산과 약 1.5㎞ 떨어져 있어 산 어귀에 당을 짓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당시 들 한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도시화되기 이전에는 당집이 평지보다 높이 솟은 곳에 위치해 사람들 눈에도 잘 띄었고, 당집에서 마을도 잘 내려다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구획정리가 이루어지면서 현재 모습으로 바뀌었고, 주변에도 [집들이](/topic/집들이) 들어서면서 다른 집들과 뒤섞이게 되었다. 원래 제당은 7㎡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가 1986년에 개축하고 문화재 지정 이후 2001년(辛巳年, [상량문](/topic/상량문) 기재)에 약 12㎡ 면적의 새로운 제당으로 건축되었다. 이때 원래 위치보다 오른쪽으로 약 20m 이동하여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 납도리 삼량집, [기단](/topic/기단)석 쌓기, 강화다짐 등 전통한식 구조로 지어졌다. 제당 내부에는 산신도가 있다. 산신도는 그림의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어 1986년 개축 때 페인트 가게를 하던 주민이 페인트칠을 해 형태를 복원했다. 그 후 제당을 다시 지을 때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1호 [단청](/topic/단청)장인 이정오 보[유자](/topic/유자)가 산신도(가로 180㎝, 세로 120㎝)를 그려 새롭게 [봉안](/topic/봉안)하였다. 과거 유천동산신제는 상평마을과 중평마을의 동계인 유향계에서 각각 제를 지냈다. 두 마을에서 매년 음력 동짓달에 좋은 날을 택하되 날을 달리 하여 산신제를 지내다가 1968년 유향계 총회를 통해 동짓달 초사흗날로 제일(祭日)을 정하고 이후 두 마을이 함께 지내고 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유향계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유향계는 산신제는 물론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등 공동체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도시화로 인해 가구ㆍ인구 수가 급격히 늘어남으로써 점차 유향계 운영이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산신제는 몇몇 원주민에 의해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고, 급기야 10여 명으로부터 희사금을 받아 제사를 지내는 상태였다. 1994년 더 이상 마을토박이만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마을 주민들은 ‘유천동산신제보존회’를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산신제를 이끌어 오고 있다. 2010년 현재 보존회 회원은 회장단을 비롯해 총 23명이다. 회장단은 회장, 부회장(2명), 재무국장, 감사(2명), 고문 등으로 구성된다. 회장은 보존회원의 투표를 통해 선정되며, 임기는 3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다. 부회장과 재무국장은 회장이 직권으로 임명하며, 감사는 회장단에서 천거하여 총회 때 결정한다. 고문은 회장이나 부회장을 지낸 사람이어야 가능하다. 일반 회원은 유천동에서 10년 이상 거주한 사람 가운데 산신제 참석률이 좋고 협조도 잘하는 사람을 천거하여 뽑는다. 천거는 회장단에서 하되 총회를 통해 결정한다. 정기총회는 일 년에 한 번 산신제 열흘 전에 개최하며, 필요에 따라 임시총회를 열 수 있다. 보존회원은 일정의 연회비를 납부할 의무가 있으며, 2년 이상 회비 미납자, 회의 불참자, 유천동의 생활권을 벗어난 자 등은 자동으로 제명된다. | 역사 | 유천동에서 언제부터 산신제를 지냈는지 알 수 없지만 [마을](/topic/마을) 거주자들은 1500년대 중기부터 지내온 것으로 여기고 있다. 유천동산신당 역시 언제 지어졌는지 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어져 오는 구술에 따르면 과거에도 지금의 위치 그대로였다. 유천동산신당은 특이하게 들 한가운데에 있다. 산신당은 보통 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마련이지만 보문산 산신을 모시는 유천동은 실재 보문산과 약 1.5㎞ 떨어져 있어 산 어귀에 당을 짓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당시 들 한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도시화되기 이전에는 당집이 평지보다 높이 솟은 곳에 위치해 사람들 눈에도 잘 띄었고, 당집에서 마을도 잘 내려다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구획정리가 이루어지면서 현재 모습으로 바뀌었고, 주변에도 [집들이](/topic/집들이) 들어서면서 다른 집들과 뒤섞이게 되었다. 원래 제당은 7㎡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가 1986년에 개축하고 문화재 지정 이후 2001년(辛巳年, [상량문](/topic/상량문) 기재)에 약 12㎡ 면적의 새로운 제당으로 건축되었다. 이때 원래 위치보다 오른쪽으로 약 20m 이동하여 [맞배지붕](/topic/맞배지붕), 납도리 삼량집, [기단](/topic/기단)석 쌓기, 강화다짐 등 전통한식 구조로 지어졌다. 제당 내부에는 산신도가 있다. 산신도는 그림의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어 1986년 개축 때 페인트 가게를 하던 주민이 페인트칠을 해 형태를 복원했다. 그 후 제당을 다시 지을 때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1호 [단청](/topic/단청)장인 이정오 보[유자](/topic/유자)가 산신도(가로 180㎝, 세로 120㎝)를 그려 새롭게 [봉안](/topic/봉안)하였다. 과거 유천동산신제는 상평마을과 중평마을의 동계인 유향계에서 각각 제를 지냈다. 두 마을에서 매년 음력 동짓달에 좋은 날을 택하되 날을 달리 하여 산신제를 지내다가 1968년 유향계 총회를 통해 동짓달 초사흗날로 제일(祭日)을 정하고 이후 두 마을이 함께 지내고 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유향계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유향계는 산신제는 물론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등 공동체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도시화로 인해 가구ㆍ인구 수가 급격히 늘어남으로써 점차 유향계 운영이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산신제는 몇몇 원주민에 의해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고, 급기야 10여 명으로부터 희사금을 받아 제사를 지내는 상태였다. 1994년 더 이상 마을토박이만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마을 주민들은 ‘유천동산신제보존회’를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산신제를 이끌어 오고 있다. 2010년 현재 보존회 회원은 회장단을 비롯해 총 23명이다. 회장단은 회장, 부회장(2명), 재무국장, 감사(2명), 고문 등으로 구성된다. 회장은 보존회원의 투표를 통해 선정되며, 임기는 3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다. 부회장과 재무국장은 회장이 직권으로 임명하며, 감사는 회장단에서 천거하여 총회 때 결정한다. 고문은 회장이나 부회장을 지낸 사람이어야 가능하다. 일반 회원은 유천동에서 10년 이상 거주한 사람 가운데 산신제 참석률이 좋고 협조도 잘하는 사람을 천거하여 뽑는다. 천거는 회장단에서 하되 총회를 통해 결정한다. 정기총회는 일 년에 한 번 산신제 열흘 전에 개최하며, 필요에 따라 임시총회를 열 수 있다. 보존회원은 일정의 연회비를 납부할 의무가 있으며, 2년 이상 회비 미납자, 회의 불참자, 유천동의 생활권을 벗어난 자 등은 자동으로 제명된다. | 지역사례 | 대전을 비롯해 충청도지방에도 다양한 산신제가 전승되고 있다. 이들 제의는 과거에 [제관](/topic/제관)들 중심으로 엄숙하게 지내왔으나 점차 대중화․축제화되고 있다. 대전 지역에서는 관저동의 구봉산산신제, 보문산 시루봉산신제, 도마동의 도솔산산신제 등이 전승되고 있다. 인근에도 [계룡산산신제](/topic/계룡산산신제)를 비롯하여 부여의 저석리, 옥산면, 은산면 등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특히 부여는 국[가지](/topic/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은산별신제가 전승되는 곳이기도 하다. 은산의 별신당에 [장군](/topic/장군)(복신대사, 토진대사)과 함께 모셔진 산신도가 있고, 따로 산신을 위한 독산제당(獨山祭堂)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산신이 당의 원래 주인으로서 [마을](/topic/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임을 알 수 있다. | 참고문헌 | 유천동산신제와 [거리제](/topic/거리제) (이필영, 대전문화 11, 대전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2) 유천동산신제 (대전광역시, 2005) | 지역사례 | 대전을 비롯해 충청도지방에도 다양한 산신제가 전승되고 있다. 이들 제의는 과거에 [제관](/topic/제관)들 중심으로 엄숙하게 지내왔으나 점차 대중화․축제화되고 있다. 대전 지역에서는 관저동의 구봉산산신제, 보문산 시루봉산신제, 도마동의 도솔산산신제 등이 전승되고 있다. 인근에도 [계룡산산신제](/topic/계룡산산신제)를 비롯하여 부여의 저석리, 옥산면, 은산면 등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특히 부여는 국[가지](/topic/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은산별신제가 전승되는 곳이기도 하다. 은산의 별신당에 [장군](/topic/장군)(복신대사, 토진대사)과 함께 모셔진 산신도가 있고, 따로 산신을 위한 독산제당(獨山祭堂)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산신이 당의 원래 주인으로서 [마을](/topic/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임을 알 수 있다. | 참고문헌 | 유천동산신제와 [거리제](/topic/거리제) (이필영, 대전문화 11, 대전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2) 유천동산신제 (대전광역시,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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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속학회 | 서울굿의 다양성과 구조 | 김헌선 |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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