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에서 행해지는 [마을](/topic/마을)제의. 이 당제는 2003년 4월 24일에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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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박경신 |
정의 |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에서 행해지는 [마을](/topic/마을)제의. 이 당제는 2003년 4월 24일에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 정의 |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에서 행해지는 [마을](/topic/마을)제의. 이 당제는 2003년 4월 24일에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이 당제의 역사적 유래에 대한 정확한 문헌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마을](/topic/마을) 노인들이 이 동제가 200년 이상 되었다고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증언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당제는 유교식 제의와 [별신굿](/topic/별신굿)의 이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울산지역 해안마을 당제의 일반적인 형식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정이 마을마다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아직도 별신굿을 하는 마을에서는 유교식 제의와 별신굿을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마을에서는 이 년마다 한 번 음력 시월 초하룻날부터 사나흘 동안 24거리의 별신굿을 한다. 이 별신굿은 동해안세습무집단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는데 동해안굿 가운데에서 가장 충실하게 자료조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마을 별신굿은 부정거리-상하당맞이-[가망](/topic/가망)거리-세존거리-성조거리-군웅거리-제석거리-내천왕거리-산신거리-조상거리-손님거리-대왕거리-외성조거리-외세존거리-우천왕거리-용왕거리-맹인거리-부인거리-소가망거리-황제거리-걸립거리-장수거리-월래거리-대거리 등 24거리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산동의 유교식 제의는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과, 별신굿이 있는 해의 음력 10월 초하루 즉 별신굿 첫날 자시(子時)에 남자들인 마을 임원들의 주관 아래 신당(神堂)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유교식 제의는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행해지는 제의와 별신굿이 있는 해의 10월 초하루에 지내는 두 [가지](/topic/가지) 유형이 있다. 결국 이 마을에서는 이 년을 주기로 세 차례의 유교식 제의와 한 차례의 별신굿이 진행되는 셈이다. 이 마을의 신당은 마을 북쪽 끝의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작은 [기와집](/topic/기와집)으로 되어 있다. 산자락이 약간 경사가 있어서 35도 정도의 [계단](/topic/계단)을 통해 신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신당 안에는 제물을 진설할 수 있는 작은 단이 마련되어 있고, 다른 장치는 없다. 유교식 제의는 신당과 작은당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물론 중심이 되는 것은 신당에서의 제의이다. 신당에서의 제의는 제주(祭主)와 마을 임원 한 사람이 참여한다. 신당 안은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들어가기에는 불편할 정도로 좁다. 제물을 진설한 다음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재배(再拜)한다. 이때 제주는 부복(俯伏)하여 있고, 다른 마을 임원이 준비해 온 [축문](/topic/축문)을 읽는다. 축문 낭독이 끝나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신단을 향해 재배한다. 재배가 끝나면 다시 [정화수](/topic/정화수)(井華水)를 한 사발 신단에 올리고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다시 재배한다. 제주가 먼저 소지(燒紙) 한 장을 올리고 난 후, 이어서 마을 임원이 다시 소지 한 장을 올리고는 제를 끝낸다. 두 사람이 [음복](/topic/음복)(飮福)을 한다. 잠시 후에 제물을 물려서 그 물린 제물의 일부를 따로 자그마한 상(床)에다 담아 신당의 바깥쪽을 향해 차려 놓고는 제주가 간단하게 거리물림을 한다. 이들이 신당에서 제를 지내는 동안 또 다른 마을 임원 몇 사람은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아랫당에 가서 간단히 제를 지낸다. 유교식 제의에서는 제문(祭文)을 사용한다. 이 제문은 [한지](/topic/한지)에 붓으로 쓴 것이다. 이 마을에서는 제의 때마다 제문을 새로 작성하지는 않고 한 번 쓴 것을 연월일(年月日)의 간지(干支)만 바꾸어서 계속 사용한다. 제물은 유교식 제의에서 쓰는 것과 별신굿에서 쓰는 것이 다르다. 어느 쪽이든 마을에서 비용을 받아 전적으로 제주의 집에서 준비한다. 시장에서 사와야 하는 것은 제주가 직접 가서 사오되 반드시 부르는 대로 그 값을 주고 사 온다. 유교식만 할 때에는 비교적 간단하게 준비해서 지내지만 별신굿을 할 때에는 많은 제물을 준비한다. 별신굿을 할 때에 특히 신경을 쓰는 제물은 쇠머리, 엿, 밀가루로 만든 용(龍)이다. 쇠머리는 정갈하게 다듬은 다음 푹 삶아서 [제상](/topic/제상)(祭床)에 올리게 되어 있다. 엿, 밀가루 용은 이 마을 별신굿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제물이다. 엿을 제물로 쓰는 것은 이 지역에서 미역 양식을 많이 하고 해녀(잠녀)들이 자연산 미역 채취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 미역이 줄이나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자라도록 해 달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유감주술](/topic/유감주술)로 이해할 수 있다. 밀가루 용을 제상에 올리는 것은 이 마을이 해변마을이며, 바다와 관련된 [생업](/topic/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과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 용은 밀가루를 반죽해 길이가 40㎝쯤 되게 빚어서 쟁반에 올려놓고 쟁반째 솥에 넣고 찐다. 입은 [대추](/topic/대추)로 만들고, 눈은 붉은 콩을 박아서 만든다. 경상도지방에서는 마을 수호신을 대개 ‘골매기’ 또는 ‘골매기신(神)’이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그 신이 남자인 때에는 ‘골매기할배’, 여자인 때에는 ‘골매기할매’가 된다. 이곳 일산동에서도 마을 수호신을 골매기할배와 골매기할매라고 부른다. 이들은 부부신이며, 입거시조신(入居始祖神)이고, 할배 하나에 할매가 둘이다.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마을에 부부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이 현재 상당이라는 마을 신당에 모셔져 있는 입거시조부부신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 어떤 여자가 혼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자연스럽게 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던 남자의 작은 부인이 되었다. 이 작은 부인은 마을 북쪽 끝의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현재 그 집터 자리를 ‘작은당’이라고 부른다. 이 작은당은 구조물이 없고 집터만 남아 있다. 별신굿을 할 때에는 무당들이 이 작은당에서 간단한 축원굿 한 거리를 한다. 유교식 제의이든 별신굿 제의이든 제주는 같은 사람이다. 제주는 마을 사람 가운데 신망이 있고 부정이 끼지 않은 사람으로 정한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제주는 바꾸지 않는다. 제주는 마을의 모든 제의를 주관하며, 제물을 준비하고, 제의를 집행한다. 제일이 다가오면 목욕재계하고 부부생활도 금하는 등 극도의 금기생활을 하는 것은 다른 마을과 같다. 제주와 함께 제의를 진행하는 마을 임원은 대개가 어촌계 임원들이다. 이 마을에는 어촌계가 잘 조직되어 있어서 이 마을 자치조직의 핵이자 마을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오촌계라는 튼튼한 자치조직이 살아서 기능하고 있기에 이 마을의 제의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의를 주관하는 마을 임원들은 어촌계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서로 의논해서 선정한다. 어촌계 계원은 소형어선의 선주, 선원, 해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해녀가 남자 선주, 선원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어촌계 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특이하다. 이것은 해녀들이 마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 인근은 수심이 비교적 얕고 미역이나 전복 등 어패류가 잘 자라서 이를 채취하는 일이 마을의 중요 소득원으로 되고 있다. 일산동은 울산 지역에서는 유원지로 알려져 있다. 좋은 해수욕장이 있고, 울기등대 등 명승지가 있으며, 방어진과도 바로 이어져 있다. 교통도 매우 편리하고 바로 옆에 현대중공업이 있어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난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상가가 많이 들어섰고, 따라서 주산업도 많이 변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인근에는 좋은 어장이 있고, 동해안에서는 드물게 천혜(天惠)의 항만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마을에는 어선이 상당히 많고,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아직 상당수 남아 있으며, 해녀도 상당수 있다. 어업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공동체는 미약한 상태로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근처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형성됨으로써 외지로부터 유입된 인구가 현재 상당수에 이르기는 하지만 아직도 대대로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 온 토착민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이 마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상태로나마 별신굿이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 임원들의 설명에 따르면 별신굿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호응도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신성관념도 상당히 퇴색된 상태여서 관심 있는 몇몇 마을 임원들이 힘겹게 별신굿을 꾸려 나가는 형편이다. 특히 젊은층의 반발이 상당히 거세다. 그나마 노인층이 강권해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내용 | 이 당제의 역사적 유래에 대한 정확한 문헌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마을](/topic/마을) 노인들이 이 동제가 200년 이상 되었다고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증언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당제는 유교식 제의와 [별신굿](/topic/별신굿)의 이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울산지역 해안마을 당제의 일반적인 형식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정이 마을마다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아직도 별신굿을 하는 마을에서는 유교식 제의와 별신굿을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마을에서는 이 년마다 한 번 음력 시월 초하룻날부터 사나흘 동안 24거리의 별신굿을 한다. 이 별신굿은 동해안세습무집단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는데 동해안굿 가운데에서 가장 충실하게 자료조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마을 별신굿은 부정거리-상하당맞이-[가망](/topic/가망)거리-세존거리-성조거리-군웅거리-제석거리-내천왕거리-산신거리-조상거리-손님거리-대왕거리-외성조거리-외세존거리-우천왕거리-용왕거리-맹인거리-부인거리-소가망거리-황제거리-걸립거리-장수거리-월래거리-대거리 등 24거리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산동의 유교식 제의는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과, 별신굿이 있는 해의 음력 10월 초하루 즉 별신굿 첫날 자시(子時)에 남자들인 마을 임원들의 주관 아래 신당(神堂)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유교식 제의는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행해지는 제의와 별신굿이 있는 해의 10월 초하루에 지내는 두 [가지](/topic/가지) 유형이 있다. 결국 이 마을에서는 이 년을 주기로 세 차례의 유교식 제의와 한 차례의 별신굿이 진행되는 셈이다. 이 마을의 신당은 마을 북쪽 끝의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작은 [기와집](/topic/기와집)으로 되어 있다. 산자락이 약간 경사가 있어서 35도 정도의 [계단](/topic/계단)을 통해 신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신당 안에는 제물을 진설할 수 있는 작은 단이 마련되어 있고, 다른 장치는 없다. 유교식 제의는 신당과 작은당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물론 중심이 되는 것은 신당에서의 제의이다. 신당에서의 제의는 제주(祭主)와 마을 임원 한 사람이 참여한다. 신당 안은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들어가기에는 불편할 정도로 좁다. 제물을 진설한 다음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재배(再拜)한다. 이때 제주는 부복(俯伏)하여 있고, 다른 마을 임원이 준비해 온 [축문](/topic/축문)을 읽는다. 축문 낭독이 끝나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신단을 향해 재배한다. 재배가 끝나면 다시 [정화수](/topic/정화수)(井華水)를 한 사발 신단에 올리고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다시 재배한다. 제주가 먼저 소지(燒紙) 한 장을 올리고 난 후, 이어서 마을 임원이 다시 소지 한 장을 올리고는 제를 끝낸다. 두 사람이 [음복](/topic/음복)(飮福)을 한다. 잠시 후에 제물을 물려서 그 물린 제물의 일부를 따로 자그마한 상(床)에다 담아 신당의 바깥쪽을 향해 차려 놓고는 제주가 간단하게 거리물림을 한다. 이들이 신당에서 제를 지내는 동안 또 다른 마을 임원 몇 사람은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아랫당에 가서 간단히 제를 지낸다. 유교식 제의에서는 제문(祭文)을 사용한다. 이 제문은 [한지](/topic/한지)에 붓으로 쓴 것이다. 이 마을에서는 제의 때마다 제문을 새로 작성하지는 않고 한 번 쓴 것을 연월일(年月日)의 간지(干支)만 바꾸어서 계속 사용한다. 제물은 유교식 제의에서 쓰는 것과 별신굿에서 쓰는 것이 다르다. 어느 쪽이든 마을에서 비용을 받아 전적으로 제주의 집에서 준비한다. 시장에서 사와야 하는 것은 제주가 직접 가서 사오되 반드시 부르는 대로 그 값을 주고 사 온다. 유교식만 할 때에는 비교적 간단하게 준비해서 지내지만 별신굿을 할 때에는 많은 제물을 준비한다. 별신굿을 할 때에 특히 신경을 쓰는 제물은 쇠머리, 엿, 밀가루로 만든 용(龍)이다. 쇠머리는 정갈하게 다듬은 다음 푹 삶아서 [제상](/topic/제상)(祭床)에 올리게 되어 있다. 엿, 밀가루 용은 이 마을 별신굿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제물이다. 엿을 제물로 쓰는 것은 이 지역에서 미역 양식을 많이 하고 해녀(잠녀)들이 자연산 미역 채취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 미역이 줄이나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자라도록 해 달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유감주술](/topic/유감주술)로 이해할 수 있다. 밀가루 용을 제상에 올리는 것은 이 마을이 해변마을이며, 바다와 관련된 [생업](/topic/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과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 용은 밀가루를 반죽해 길이가 40㎝쯤 되게 빚어서 쟁반에 올려놓고 쟁반째 솥에 넣고 찐다. 입은 [대추](/topic/대추)로 만들고, 눈은 붉은 콩을 박아서 만든다. 경상도지방에서는 마을 수호신을 대개 ‘골매기’ 또는 ‘골매기신(神)’이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그 신이 남자인 때에는 ‘골매기할배’, 여자인 때에는 ‘골매기할매’가 된다. 이곳 일산동에서도 마을 수호신을 골매기할배와 골매기할매라고 부른다. 이들은 부부신이며, 입거시조신(入居始祖神)이고, 할배 하나에 할매가 둘이다.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마을에 부부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이 현재 상당이라는 마을 신당에 모셔져 있는 입거시조부부신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 어떤 여자가 혼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자연스럽게 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던 남자의 작은 부인이 되었다. 이 작은 부인은 마을 북쪽 끝의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현재 그 집터 자리를 ‘작은당’이라고 부른다. 이 작은당은 구조물이 없고 집터만 남아 있다. 별신굿을 할 때에는 무당들이 이 작은당에서 간단한 축원굿 한 거리를 한다. 유교식 제의이든 별신굿 제의이든 제주는 같은 사람이다. 제주는 마을 사람 가운데 신망이 있고 부정이 끼지 않은 사람으로 정한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제주는 바꾸지 않는다. 제주는 마을의 모든 제의를 주관하며, 제물을 준비하고, 제의를 집행한다. 제일이 다가오면 목욕재계하고 부부생활도 금하는 등 극도의 금기생활을 하는 것은 다른 마을과 같다. 제주와 함께 제의를 진행하는 마을 임원은 대개가 어촌계 임원들이다. 이 마을에는 어촌계가 잘 조직되어 있어서 이 마을 자치조직의 핵이자 마을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오촌계라는 튼튼한 자치조직이 살아서 기능하고 있기에 이 마을의 제의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의를 주관하는 마을 임원들은 어촌계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서로 의논해서 선정한다. 어촌계 계원은 소형어선의 선주, 선원, 해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해녀가 남자 선주, 선원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어촌계 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특이하다. 이것은 해녀들이 마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 인근은 수심이 비교적 얕고 미역이나 전복 등 어패류가 잘 자라서 이를 채취하는 일이 마을의 중요 소득원으로 되고 있다. 일산동은 울산 지역에서는 유원지로 알려져 있다. 좋은 해수욕장이 있고, 울기등대 등 명승지가 있으며, 방어진과도 바로 이어져 있다. 교통도 매우 편리하고 바로 옆에 현대중공업이 있어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난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상가가 많이 들어섰고, 따라서 주산업도 많이 변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인근에는 좋은 어장이 있고, 동해안에서는 드물게 천혜(天惠)의 항만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마을에는 어선이 상당히 많고,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아직 상당수 남아 있으며, 해녀도 상당수 있다. 어업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공동체는 미약한 상태로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근처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형성됨으로써 외지로부터 유입된 인구가 현재 상당수에 이르기는 하지만 아직도 대대로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 온 토착민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이 마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상태로나마 별신굿이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 임원들의 설명에 따르면 별신굿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호응도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신성관념도 상당히 퇴색된 상태여서 관심 있는 몇몇 마을 임원들이 힘겹게 별신굿을 꾸려 나가는 형편이다. 특히 젊은층의 반발이 상당히 거세다. 그나마 노인층이 강권해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의의 | 일산동당제, 특히 [별신굿](/topic/별신굿)은 신성한 제의이자 [마을](/topic/마을)공동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당제 기간이 되면 어선들은 어로작업도 중지하고 오색 깃발을 달아 축제 분위기를 돋운다. 외지에 나가 살고 있는 이 마을 출신 인사들도 마치 설이나 추석에 귀성하는 사람들처럼 고향마을로 돌아온다. 골매기할배․골매기할매의 보호 아래 자신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였고, 골매기할배․골매기할매의 음덕이 지금도 자신과 마을 사람들을 함께 지켜 주고 있다는 굳건한 공동체의식이 지금도 살아서 숨쉬는 것이 이 마을 당제의 현장이다. | 참고문헌 | 울산지방무가자료집 1~5권 (박경신 엮음, 울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3) 한국의 [별신굿](/topic/별신굿) 무가 1~12권 (박경신, 국학자료원, 1999) | 의의 | 일산동당제, 특히 [별신굿](/topic/별신굿)은 신성한 제의이자 [마을](/topic/마을)공동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당제 기간이 되면 어선들은 어로작업도 중지하고 오색 깃발을 달아 축제 분위기를 돋운다. 외지에 나가 살고 있는 이 마을 출신 인사들도 마치 설이나 추석에 귀성하는 사람들처럼 고향마을로 돌아온다. 골매기할배․골매기할매의 보호 아래 자신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였고, 골매기할배․골매기할매의 음덕이 지금도 자신과 마을 사람들을 함께 지켜 주고 있다는 굳건한 공동체의식이 지금도 살아서 숨쉬는 것이 이 마을 당제의 현장이다. | 참고문헌 | 울산지방무가자료집 1~5권 (박경신 엮음, 울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3) 한국의 [별신굿](/topic/별신굿) 무가 1~12권 (박경신, 국학자료원,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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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사 | 한국민속대사전 1 | 1991 | 민속원 | 동신당 | 김태곤 | 1999 | 도서출판 民俗苑 | 한국의 굿 | 하효길 외 | 2002 | 도서출판 창솔 | 한국민속문화대사전 상 | 김용덕 |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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